[지수]2021년 6월 4일 금요일 - 그래, 난 A형이니까

덕수
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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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이 뭐예요?”

유치원 다닐 무렵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혈액형이 뭐냐고 물었다. 질문을 건네고 상대의 답변이 끝나면, 나는 신이 난 얼굴로 하고 싶은 말을 뱉어냈다.

“저는 A형이에요! 저희 가족 전부 A형이에요! 엄마, 아빠, 지희, 영규 다요!”

부모님, 나, 여동생, 남동생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은 전부 A형이다. 당시 나는 이 사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알파벳송을 배울 때 제일 처음 발음하게 되는 A를 혈액형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 가족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최고의 가족인 거 같았다. 이 대단한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혈액형 이야기부터 꺼냈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A형이란 사실을 꼭 알아주길 바랐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내 혈액형이 불편했다.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면, “야! 지수 A형이잖아~ㅋㅋ”, “에? A형인데 왜 그래?” 따위의 말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정신없는 시기를 보냈다. 애초에 또라이로 낙인되어 무슨 언행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AB형이 부러웠다. 본성이 싹수없음으로 통하는 시니컬한 B형도 마찬가지.


중학생이 돼서야 혈액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열성/우성에서 뭐가 특별하게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는 걸, 혈액형만으로는 사람의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혈액형이 뭐냐고 묻는 말에 "뭐 같아 보여요? ㅎㅎ"란 질문들 던지며 타인이 말하는 나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가끔 나는 내가 마주한 상황이나 느끼는 감정들을 혈액형에 대입해 본다. 자아도취 하며 의미 부여 중은 아닌지, 괜한 눈치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뒤로 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중은 아닌지, 생각의 방향 자체가 그른 건 아닌지, 다른 식으로 풀어나갈 방법은 없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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