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2022년 5월 15일 일요일 - 모호한 게 당연했는데

moto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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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알지 못하면서 나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혁신가나 선구자라고 부른다.
기존에 있던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모호함은 기본값이다. 

이 일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일지, 돈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심지어 이 길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함의 집합체가 스타트업이 아닐까. 

그래서 기민하게 시장의 반응을 살피고, 빠르게 수정하여 대응하고, 수없이 피봇하며
모호한 길을 조금은 덜 모호하게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건 두 번째다.
첫 번째 스타트업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업무인 회계와 출판을 담당했기 때문에 스타트업에 다닌다는 감각은 좀 덜했다. 

하지만 두 번째 스타트업에서는 기획 일을 하다 보니,
스타트업의 모호함과 기획 업의 모호함이 곱해져 혼돈의 도가니 속에 있는 느낌이다. 

회계처럼 명확한 답이 있는 영역이 아니라 답이 명확하지 않은 일이 하고 싶어서 기획에 도전했는데,
기획은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는 답을 찾아내는 과정에 가까운 것 같다.
그 답은 일을 의뢰한 고객에게 있을 수도 있고, 우리의 콘텐츠를 이용하는 소비자에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목소리에 모두 응답하는 '좋은 결과물'이란 과연 존재할까?
결국 기획자가 중심을 잡고 고객과 소비자의 모호한 기준을 파악해서
'당신이 원하는 결과물은 이것입니다.' 하고 제안하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의 의견을 수용한 끝에
코끼리 몸뚱이에 학의 다리와 기린의 목과 사자의 갈기가 붙은 듯한 기괴한 결과물이 나오게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기획 일을 시작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기획에 대한 작은 결론을 내렸다.
내 중심을 잡고, 선택하여 의견을 반영하기.


작은 결론이 나왔으니, 이제는 갈고닦을 차례.
동료들의 일하는 방식을 보고 배우면서, 멋진 기획자들의 선례를 탐구하면서 기획의 감을 다듬어가려고 한다.
그다음 이런 저런 기획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기획을 뾰족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스타트업에서 기획을 한다는 것. 모호한 게 당연했는데 성급하게 답을 얻고자 해서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생각이 복잡한 시기를 지나 조금은 안정화된 지금, 본질을 다시 생각해본다.
처음 기획을 하고 싶었던 이유,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가치 같은 것들.
남들이 좋다는 기획 말고 내가 좋은 기획을 하고 싶다.
그것이 비록 소수의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기획이라 하더라도.
애초에 전 직장을 나온 이유도 거시적인 변화보다는 미시적인 변화를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서가 아니던가.
'잘하고 싶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본질을 잊지 말자.
오래도록 같은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가를 고민하자.
천천히 소진되지 않게 나답게 나만의 길을 찾아보자.
하루 이틀 일하고 말 거 아니니까.


사진: 종착지를 모르지만 일단 어딘가로 가고 있는 김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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