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7일 일요일 - 행복한 관성

moto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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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내가 매일 일기를 쓴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는 반응인데, 매일 시계부를 쓴다고 하면 표정이 재미있어진다.
일단은 "시계부가 뭐예요?"라고 묻고, 그 다음은 "어떻게 매일 해요?" 하고 놀라워한다. 


시계부는 시간 가계부라고 보면 되는데, 가계부에는 돈을 어떻게 썼는지 기록하고 시계부에는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적는다.
나의 24시간을 작은 수첩에 매일 기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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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계부를 쓰게 된 건 올해 1월 4일부터였다.
1월 1일도 아니고 왜 1월 4일인가 하면, 그때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새해에는 새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으로 썼다면 작심삼일에 그쳤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일이 그렇듯, 시작은 미비했다.
우연히 지인에게 하루를 시간 단위로 기록할 수 있는 데일리 다이어리를 나눔 받았다.
뭐, 한번 써볼까 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했다. 

때마침 나는 시간 관리가 필요한 백수였는데, 여러 개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굴리느라 직장인 못지 않은 밀도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일정에 휘둘리는 기분을 다잡고 싶었다. 


시계부에는 기상부터 식사, 프로젝트 실행, 휴식, 취침까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기록했다.
어떤 날은 너무나도 성실히 살아서 보람차기도 했고, 어떤 날은 기록할 것이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시간을 쓰고 있는지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서 변명의 여지 없이 반성하기도,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쉬웠다.

처음에는 시간만 기록하다가 그 다음에는 내일의 할일도 함께 정리했다.
하루 전에 다음 날 일정을 정리해두니 아침에 허둥지둥하지 않고 바로 일정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에 일기장에 기록할 에피소드나 인사이트도 기록해놓았다.
시계부 다이어리는 내 일상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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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 신기하기는 하다. 어떻게 매일 24시간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 의지로 하려 했다면 다이어리의 2월부터는 빳빳한 새 종이로 남아 있었을 테니까.
무엇이 나를 지속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보니 결국 '관성'이었다. 몸에 밴 습관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좋은 관성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나의 일상을 더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갈 관성들을.
귀찮더라도 조금 더 건강하게 챙겨먹고,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단련하고, 조금 더 웃고, 여유를 가지는, 그런 행복한 관성을.
나의 작은 하루가 모여 삶의 방향을 바꾸듯이 나의 관성은 언젠가 나를 더 좋은 선택지로 이끌어주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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