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2022년 8월 17일 수요일 / 월간보리 6월호 (부제: 식중독)

보리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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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는 사진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큰 사건이 내 일상을 뒤흔들어놨기 때문에. 6월 중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하려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아팠다. 아침에 집에 있었던 아서의 도움을 받아 겨우 병원에 갔다. 그때부터 이미 고열을 동반한 열몸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코로나라고 확신하면서 격리 병실에 입원을 했다. 열이 너무 높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해열제, 진통제, 수액 등을 맞기 시작했다. 처음에 입원할 때까지만 해도 입원이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주사를 계속 맞고 있는데 열은 쉽사리 내리지 않았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온갖 검사를 다 하면서 점점 몸은 고통스러워지고 있었다. 

입원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병원에 입원을 해있는 동안 환자인 나만큼 숙현과 아서가 고생을 많이 했다. 갑작스럽게 입원한 바람에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을 가져다주고, 필요한 물품을 사다주고, 곁에서 상태를 지켜봐주었다. 부모님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다.

몇 일 후, 원인은 식중독으로 밝혀졌다. 캄필로박터균. 그 전 주말에 먹었던 닭 육회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원인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병원에서 쉽사리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한국병원으로 전원을 했다. 전원하는 과정은 정말 인생에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특히, 응급실에서 입원 검사를 위해 살을 째는 고통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몇 일간의 입원으로 이미 양 팔은 수없이 많은 주사 바늘 자국이 나있었고, 혈관은 온통 터져있었다. 나중에는 팔과 손등에는 더 이상 주사를 꽂을 곳이 없을 정도였고, 혈관이 안쪽으로 다 숨어들어가 간호사 선생님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인체의 신비!) 

여기저기 멍 든 팔은 도라에몽처럼 부풀어올랐다. 예전에 어깨 인대가 찢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이렇게 부풀어오른 팔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팔뿐만 아니라 얼굴도 퉁퉁 부어올랐다. 아픈 와중에도 퉁퉁한 얼굴이 웃겨서 거울을 보며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고열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장염 증상이 시작되었다. 수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고 계속 토하기 시작했다. 병실에 비닐봉지를 두고 계속, 계속 토했다. 물만 마셔도 토하더니, 나중에는 거품만 토하기도 했다. 이 거품이 뭐냐고 여쭤보니, 침이라고 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침만 나오게 되는 거라고. (인체의 신비!) 

팔 붓기가 조금 빠진 것이 신기해서 찍어둔 사진. 그러나 상태는 여전히 위중했고, 쉽사리 낫지 않아서 꽤 오래 입원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식중독이어도 2~3일이면 퇴원한다던데, 나는 기약도 없이 입원을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식중독이 아닌 다른 병을 의심하시기도 했다. 너무 많은 주사를 맞아서 폐에 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숨을 잘 쉴 수 없었다. 결국, 호흡기를 달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산소포화도를 측정할 때, 실은 너무 무서웠다. 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산소포화도가 80까지도 떨어졌기 때문에. 혹시라도 몸이 더 악화될까봐 호흡기를 달고 계속 숨을 쉬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토하고, 화장실을 가기를 반복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전혀 씻지를 못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씻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를 본 하우스메이트들은 신기하게 얼굴이 뽀얗고 기름이 지지 않았다고 했다. 강제 디톡스의 효과였을지도 모른다. 5일간, 전혀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속 토하니, 물과 이온 음료만 겨우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먹지 못해도 몸이 낫지 않는다는 소리에, 억지로 흰죽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섯 숟갈을 겨우 먹었다. 그래도 뭔가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그리고 먹는 약도 함께 복용하기 시작했다. 

하우스메이트들은 두 번째 병원에도 여전히 다녀갔다. 아서는 보호자로 등록되어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고, 샐리도 틈틈히 다녀갔다.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을 때는 나 대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기도 했고,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 선생님들과 소통해주기도 했다. 말을 하기도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딱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번갈아가면서 거의 매일, 매 순간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냥 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절대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8일간의 입원 끝에 퇴원을 하는 날이 오긴 왔다.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나에게는 8일이 80일 같았다. 

퇴원하는 날, 아서와 샐리가 차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엉엉 울었다. 입원했던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도 했고, 그 시간동안 내 곁을 지켜주었던- 그리고 퇴원하는 날까지 나를 돌봐주는 하우스메이트들이 너무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창 밖에 보이는 아름다운 목포의 풍경이 어쩐지 너무 아름답고, 반갑기도 했다. 온갖 감정에 휩싸여서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나를 데리고 목포대교 앞으로 간 하우스메이트들. 이 자리에서 또 얼마나 하염없이 울었는지.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며 6월을 마무리했다. 

엄마가 선물한 옷을 입고 인증샷을 찍은 숙현과 아서. 퇴원한 후. 아니, 이미 입원을 했을 때부터 서울에 계신 부모님은 하우스메이트들에게 너무나 미안해하고, 고마워하셨다. 입원하자마자 당장 목포에 오시겠다는 것을 뜯어 말리는 바람에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한 명밖에 등록이 되질 않았고, 만약 부모님이 오셨다면 내 꼴을 보고 더 마음 아파하실 것이 분명했고, 그런 부모님을 보며 마음까지 아프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애만 태우셨는데, 계속 상황을 공유해준 아서와 샐리 덕분에 한시름 놓으실 수 있었다. 엄마가 그랬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가 아니겠냐고. 말해서 뭐하겠는가. 이 다이어리를 빌어서,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해본다. 고맙고, 사랑해!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하우스메이트들아! 그리고 다들 ※중요여름에 식중독 조심하시고, 닭 육회는 먹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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