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공장을 만나기 100m 전

황일화
2019-03-22 01:05
조회수 206

나는 부또황. 

하지만, 오늘은 황일화 버전으로 글을 쓴다.

그래서 재미 없을 거다. 그러니 재미 없다고 할 사람은 읽지 말길.


대학 졸업 직후부터 어디어디를 거쳐서 지금 이곳에 왔는지 예쁘게 펼쳐보려고 한다.

아픈 일들을 최대한 담백하게 추려서 쓸 거다. 

그러니까 이걸 보고 제발,

이정도로 뭐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길. 


그럼 시작.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시시때때로 고민했다. 

몇년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거였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취업을 하게 됐다. 

그때는 착한 딸이었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차분하고, 조용하고, 꼼꼼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들으며 자랐는데,

나의 담임들과 부모님은 

내가 덜렁대느라 맨날 다치고, 맨날 장난을 치며 숨넘어가게 웃고, 체육 시간을 무척 좋아하는 것을 몰랐다.

어쨌든 그렇게 자란 나는 대학 졸업 후 

사람인 사이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어를 쓸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하고 찾다가

나한테 어울릴 것 ‘같은’(어른들이 그렇다고 했던) 무역사무원을 골랐다.




01 첫 번째 직장, 무역회사


삐까뻔쩍한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칸막이는 하나도 없는 커~다란 사무실이 나왔다.

숨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리고, 사람들이 화장실도 안가는 커~다란 사무실.

그렇게 소름 끼치게 조용한 가운데, 

이사가 쌍욕하면서 과장 얼굴에 서류뭉치를 집어 던지거나, 구석에서 골프 연습하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곳. (진심 드라마 같았음)

일 한지 한 달 됐을 때,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전 직원이 밥도 못 먹고 5시까지 회의실에 갇혀있었는데, 

풀려나자마자 밥도 안 먹이고 야근 시키던 그런 곳. 


사수 였던 민수는 나에게 일을 일부러 틀리게 가르쳐주고, 

대리가 지나가면 큰 소리로 “일화씨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아, 지금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한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처음에는 내가 정말 일을 못하나 했는데, 주말에 단 둘이 당직서는 날 그의 고백, 

“난 나보다 좋은 대학 나온 애들 안 좋아해. 니 자리에 부산대 나온 애도 있었는데, 내가 걔도 내보냈지.” 

하.. 스카이 나온 것도 아닌데 너무한 거 아닌가.


물론, 업무가 아무런 의미도 재미도 없었던 것이 가장 컸지만, 

수많은 부수적인 아름다운 이유들도 한몫하여

인턴기간이 끝난 후 부장이 정규직 전환을 하자고 했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나의 대답. 

“아니요. 그만두겠습니다.”




02 하차입니다 데굴데굴


 무역회사를 다니면서 조금씩 가족과 마음의 거리가 생겼다. 

(그때는 슬펐지만 지금은.. 필요한 거리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도 슬프긴 해) 

가족들이 민수 욕이라도 조금 해줬으면 해서, 

회사에서 힘들었던 일을 집에서 일부러 웃으면서 밝게 말했다. 밝게 말한 게 잘못이었을까? 


“와 그 놈 진짜 이상한 놈 아냐?” 한마디면 됐을 텐데, 

입을 떼자마자 이미 가족 3인의 인상이 구겨져 있다. 

음 이것도 진짜 드라마 같았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다 그렇게 사는 데 너는 왜 못 버티냐고. 너 그렇게 약해빠져서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냐고. 


정말 여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영어 학원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는, 

그 무역회사 이사가 과장들에게 그랬듯, 아버지가 나에게 욕과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이거는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데, 그게 그렇게 그럴 일인가 정말? ㅋㅋㅋ


어쨌든 나는 착한 딸에 성실한 모범생으로 자랐기에, 

모두를 태운 채 달리고 있는 그 “열차”에서 내려오면, 정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막 노숙자가 되서 길에서 구걸하다가 죽게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건 생각만 했고, 대신 다음 생에는 꼭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생각이 족쇄에라도 묶여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해진 반경 안에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러다가, 음, 아마 책을 읽다가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인생은 한 번뿐인 거 아닌가? 이번 인생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면 그대로 끝 아닌가?


그래서 타투를 했다. 갑분타. 

타투를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에게는 평생 이렇게 살겠다는 굳은 다짐 같은 거였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고 나만 잘 보이는 곳에 나만 잘 보이는 글씨로 새겼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보여달라고 하지 말라’는 의미.

그리고 나는 “인생은 한 번 뿐이다.”라는 문장과 함께, “다들 그렇게 산다.”는 그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03 두 번째 직장, 영어학원


무역회사를 퇴사 하고, 바로 TESOL(영어강사 자격증)을 준비해 강사가 되었다. 

학원에 면접을 보러 가서야 알았다, 그렇게 큰 학원인 지. 

강사는 약 100 명, 학생수 약 3천 명. 


수업 시간표가 학기 첫날, 첫 수업 들어가기 30분 전에 나왔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 학원에서는 강사들이 하루에 6-7개의 수업을 뛰고, 수업 간 쉬는 시간은 5분이었는데, 

시간표가 첫 수업 30분 전에 나왔으니, 30분 안에 6개 수업의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첫 수업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영악한 초딩, 중딩들에게 한 학기 동안 물어 뜯겨야 했다는 뜻. 


어쨌든 학원생이 3천명인데,

4대 보험이 안 되는 것도 당연하고, 주말 출근도 당연하며, 

강사는 당연히 멀리서도 원장에게 인사를 해야 하지만, 원장은 코앞에서 인사를 해도 씹는 것이 당연하고,

시간표는 (literally: 말 그대로) 맨날 바뀌고, 

상담을 다른 학원의 2배씩 하는 학원에서, 

나는 잘 버텼다. 


일단 일이 재미있었고, 학생들이 좋았고, 학생들도 나를 좋아했고, 

무역회사에서 매일 가시방석에 앉은 듯 일했던 거만 생각하면 그 어떤 일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났을 때, 점점 장사가 잘되던 그 학원에서 

새 학기 신입생을 300명을 더 받고, 강사는 1명도 더 뽑지 않았다. ㅋ. 

원래도 정말 빡셌다. 원래도 겨우 버텼다. 

그런데 업무 강도가 극한으로 올라가면서 주위의 많은 선생님들이 아프거나 그만두기 시작했다. 

나는 6개월을 더 버텼다. 여기에서도 못 버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공황과 우울을 만났다.


우울~과 공황이 내 얘기가 될 줄은~ 몰랐어~


우울과 공황과 함께 버티던 나는, 

여행을 갔다가 접촉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목이 점점 안좋아지다가 딱 스승의 날,

스승의 날 아침에 일어나다가 목을 다쳤다.


아프기도 하고 

이게 내 첫 결근이라는 게, 

그동안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열이 들끓어도 하루도 쉬지 않았던 것이 서럽기도 해서 

병원에서 누워서 울고 있는데, 부장한테 전화가 왔다.


사람, 특히 상사를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던 내가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부장.

그 사람이 나한테 깁스라도 하고 나와서 상담이라도 해달라고 이틀 동안 계속 전화를 했다.


나는 그래서 3일 째, 목 보호대를 하고 학원에 나가서 부원장과 상담을 했다.

부원장은 지금은 안되고 방학 때 쉬라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2주 동안 목 보호대를 하고 학원에 나가 모든 수업과 상담, 성적표 제작을 마무리하고

사랑하는 제자(팬)들과 안녕했다.

정말 너무 사랑해서, 그만 두고 3달 동안 애들이 나오는 꿈을 꿨다.




04 세 번째 직장, 영화제


시발비용이라고 하던데.

학원 퇴사 후 정말 많은 물건을 샀다.

일단 책을 엄청 많이 샀고, 카메라도 사고 옷도 엄청 많이 샀다.


책을 통해서 내가 우울증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상담을 받으러 갈 용기가 없었다.


병원에서도 실망하면 정말 끝일 것 같아서 상담을 받으러 가지는 않았고

낮에는 정말 많은 걸 사고, 밤에는 미친 사람처럼 울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영화제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지금 운영하는 행사에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다고 SOS가 와서 얼떨결에 알바를 하러 나가게 됐다.

아직 새로운 사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새로운 일도 해보고 하면 마음이 좀 나아질까 싶기도 했던 것 같다.


밖에서는 또 멀쩡하게 열심히 일했기에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비슷한 행사 여러 곳에서 일을 하게 됐고, 모 영화제 행사운영팀에도 지원해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공부나 사무적인 일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행사 일을 해보니, 아니 이렇게 설레고 재미있을 수가. 

일은… 놀랍게도 학원보다 더 빡셌다. ㅋㅋㅋㅋㅋ 하지만 적성에 맞았고, 잘한다고 인정도 받으며, 심지어 좋은 팀원들과 행복하게 일했다. 

매일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도 웃으며 일했다. 그래서 이 일이구나 했다. 아 내가 이 일을 만나려고 그동안 그렇게 헤메었구나 했다.

물론 그 영화제에도 더러운 일들은 있었고, 월급은 쥐꼬리 만큼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계속 그 길을 가고 싶어졌다.




05 OO국제음악영화제


그렇게 해서 일하게 된 다음 영화제가 OO국제음악영화제였다. 

거기서 나는 민수(무역회사 싸이코패스) 보다 더 심한 인간을 만났다. 

민수 급의 친구는 또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주아(사수)를 만났다. 

주아는 정화(실장)와 친했는데, 주아는 내가 미웠나보다. 나를 모함했다. 


모함… 같은 건 내 사전에는 없는 단어인 줄 알았다.

삼국지 같은 데서나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드립 칠 때나 쓰는 단어 였는데,

진짜로 모함을 당했다. 


그녀도 모함의 고수는 아니었는지, 내가 느낄 수 있게, 다 티나게 나를 모함했다. 

그리고 폭언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도 하고 따로 불러서도 조졌다.

메일에 ‘감사합니다’라는 말 뒤에 웃음 표시(^^)를 넣었다고, 소리를 지르며 우리 엄마 욕을 했다. 


이런 ‘모욕적인 소리 지르기’가 하루에 여러 번씩 발생했고, 나는 손을 떨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담백하게 말하지만, 정말 사무실에서 앉아있기만해도 누가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듯이 아팠다.

주말에 주아의 못생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공부를 하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면 손이 떨렸다.


주아는 그런 친구였다. 강자에게는 너무 귀엽게 아양을 떨고, 나같은 약자는 밟아서 짓이기는. 

나는 그래도 잘해보려고 했다. 그래도 일을 잘하면, 군소리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그나마 분별력이 있어 보였던 정화(실장)이 주아와 같은 부류였다. 

그들은 둘이서는 내 욕을 했고, 나와 셋이서 사무실에 있을 땐 프로그래머님을 욕했다. 

신입 앞에서 대놓고 프로그래머 욕을 하다니,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오늘만 사는 사람들 같았다. 


어쨌든 수다스러운 40대 중반의 실장 정화까지 1-2층 사무실을 쏘다니며 나를 욕하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모든 눈길이 나를 아프고 불안하게 했다. 


어디서든 성실하다고 일 잘한다는 말을 듣던 나였는데, 

주아와 정화는 자꾸 나를 탕비실로 따로 불러내서 내가 일을 너무 못한다는 소리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아와 정화가 나에게 다른 사람 욕을 하는 것만 같았다. 


몇 주 뒤, 그들은 나를 내보낼 계획을 짠 듯 했다. 

이번에는 야외 테라스로 불려갔다. 

주아는 내 눈을 보며 담배를 쪽쪽 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니가 열심히 하는 건 알겠어. 근데 우리 성에 안차. 

니가 일을 너무 못해서 사무실에 피해가 가는데, 앞으로도 여기서 일 할거야? 

니가 만약 여기서 계속 일 할거면, 지금 같은 모욕감을 알고 가야 할거야. 

내일까지 나갈 건지 말지 정해서 말해줄래?


음, 나는, 내 성격은, 내 본질은, 

끝까지 버텨서 다른 팀 사람들에게라도 인정받으려 했다. 


그런데 매일 손이 떨렸고, 

매일 악몽을 꿨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걸 보니, 

나를 위해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몸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그만뒀다. 


정화는 마지막 장면을 인위적으로 미화시키려 했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발연기도 그런 발연기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이

입만열면 “이제 그런 일 그만두고 제대로 된 일 구하자”는 부모님이 눈에 밟혀 

부산으로 바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한 달 정도 

정말 방이 콩알만한 ‘노블레스’ 고시텔에서 손을 떨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작년 6월을 그렇게 보냈다.




06 마지막 기회


엄청나게 어두워진 나의 얼굴을 본 부모님은, 당분간 쉰다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래도 다시 살아나려고, 쉬었다. 

집 앞 산책로를 매일 걸었고, 마음에 와 닿는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그러다가 괜찮아마을 주민 모집 공고가 떴다.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저기 가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란다. 아, 포트폴리오가 뭐지. 한 번도 안 써봤는데. 그래도 써보기로 했다. 

포트폴리오가 뭔지 모르겠어서, 진심을 담은 편지 비슷한 것을 썼다. 


아직은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몇 주 동안 그 포트폴리오를 쓰면서, 

이것도 안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몇 년 동안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인간적으로 하면서(=인격 모독을 당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쉬면서(=적어도 주말에는 쉬면서) 할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통은 포기라고 생각하는 퇴사까지 하면서, 내 믿음을 지켜왔는데, 


OO영화제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서, 너무 지쳐버렸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거 없으니 이제 정신 차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도 안되면 적당한 회사 들어가서 돈 벌면서 살자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는 못사는 성격이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지만 꾹 누르면서, 그래 그러자고 생각했다. 




07 괜찮아마을


괜찮아마을 합격 발표날, 정말 피를 말리며 기다렸다. 하지만 오후 내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다음 날로 발표가 미뤄졌다는 연락이 왔다. 

화가 났지만 또 피를 말리며 기다렸다. 다음 날도 저녁 늦게야 전화가 왔다. 


미안한 목소리가 

나보다 더 급한, 더 간절한 사람들이 뽑히게 됐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팠다. 

다행히 며칠 뒤 동우 씨가 반가운 목소리로 추가로 합격이 됐다고 전화를 해줬고 나는 그렇게 괜찮아마을에 왔다.




원래도 낯을 가리지만 

주아와 정화로 인해 너무 상해버린 마음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기가 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특히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주아가 생각나서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내가 소망했던 대로 괜찮아마을에서 좋은 사람들을 잔뜩 만났다.


그리고 그 따뜻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은 사진전, 멋쟁이대잔치도 열고

노적봉 예술공원에서 노래도 부르며 

결국, 사람으로 치유 됐다. 


모함이라는 단어가 내 사전에 없을 줄 알았던 것처럼

치유라는 단어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치유 됐다.

결국 사람이라니 놀라운 결말.




어쨌든 나는 이제

덜 불안하고 덜 아프며, 

더 편안하고 더 따뜻하다.




08 공장공장


나는 이렇게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나를 치유한 괜찮아마을을 만든 공장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슬픈 것은 

내가 몇년간 겪은 저런 몹쓸 일들이

사실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런 일들은 정말 많은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내 친구들도 일상속에서 흔하게 겪고 있는 일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고,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이라고 하지만

개소리다.

강해진 게 아니라 병든 것 같다.

나 체력장 1급이었는데, 지금은 뼈밖에 없다. 슬프다.


다행인 것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서

결국 이곳에 왔고

이많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물론 여기도 회사는 회사인지라 

여기에서도 당연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ㅎㅎ…


하지만 여기에서는 

절대로 

폭언이 당연하지 않고, 

폭행이 당연하지 않고,

배려 없는 무식한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 


여기에서 당연한 것은 

모두의 사는 모양, 일하는 모양, 쉬는 모양, 말하는 모양, 웃는 모양, 숨쉬는 모양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오래, 잘 지내고 싶다.


11 10
늘 존경하고 사랑해요!
우리 여기에서 오래, 잘 지내요.
나도 겪어본 일이니 너도 겪어라, 너도 버텨라가 아니라 나도 겪어서 얼마나 힘든지 이해가 돼, 이런 위로가 필요한데 말이에요. 우연치않게 읽은 글에 마음이 잠깐 앉아가게 돼요. 그러게요. 세상에 당연한 폭력은 없는데 왜 응당 그래야만 배우는거라고, 돈벌려면 그정도는 힘들어야하는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모야 너무 글을 잘 쓰네 일화님 다시봄..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생긴 우울증 견디기 힘들지.나도 세상슬픈건 나한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내가 스스로 사람들과 벽을 만들고 그벽에는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새겼더라고 ..무력해지지.지금도 같은시간 같은 하늘 같은 지역에 있어도 어느 누구는 사회에대한 불안으로 ,직장에 대한 스트레스로,취업에대한 스트레스로 다들 벽을 만들어 그 속에서 우울증이란 병을 가지고 있겠지 그자체가 고립된 섬 같아!우리 좋았지 공장공장을 만났으니! 그곳에서 그대들을 안만났다면 그 벽에 같혀 그곳이 세상인줄 알았을거다. 그때 우리들 모이던 날 어색했던 그때가 아직도 좋타!덕분에 다시 그때의 기분을 떠올려 본다 ㅎㅎ
벌써 몇달이 지났대요.
슬픈 목소리로 다음을 기약하자며 소식을 전해야 했던 그 날이.
그리고 너무 기쁘게 다시 전화해서 함께하자고 했던 그 날이.

만약 그런 슬프고 기뻤던 순간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함께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 그 때에는 알았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함께 하고 있을줄을?

찰나의 순간이었고, 선택이었던 그 시간을 지나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하고 있네요.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소중한 날들을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몰랐어요 이럴 줄은.
이렇게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인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글이었어요! 일화의 맑은 웃음 뒤에 저렇게 무겁고 힘든 시간들이 숨어있었구나... 잘 버텨주고 이렇게 우리와 함께라서 정말 다행이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픈이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개소리 맞아요! 우리 아픔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아픔에 익숙해지지도 맙시다! 우리의 도래이! 오래오래 함께 해줘요~*
왠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났어요. 너무 담담해서 더 순간 울컥했어요. 나는 일화를 잘 몰랐네요. 그저 끼많고 재미있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보통이 아니고 너무 당연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화가 그렇게 빛났나봐요. 왠지 모르게 일화씨가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뭉클해지는 경험을 참 많이했어요. 맞아요 너무 자연스럽게 저는 일화찡의 팬이 되었죠. 하핫! 이런 시간이 지나고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더 당신이 좋나봐요. 이제야 이유없이 당신이 좋던 나의 마음의 이유를 알게 된것 같아요. 함께 할 수 있게 되어서 기분이 너무 좋은 요즘. 오래 잘 지내봐요 일화씨? 부또황님? 저도 노래 부르고 싶어요? ㅎㅎ
얼마나 힘들었을지 느껴져요. 물론 일화씨가 느꼈던 아픔만큼은 닿지 못하겠지만. 전 웃음이 많은 일화씨의 모습이 참 좋아요. 오래도록 웃으면서 함께 일했으면 좋겠어요!
며칠, 몇 달이 지난 뒤에 그때의 기억 속 우리는 어떨지도 궁금한 요즘이에요. 서로 부족하고 때때로 서로를 원망하고 오해하는 날이 오더라도, 하나씩 시간을 두고 해결하면 가능하지 않은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먼 시간을 돌아와서 서로를 더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먼 시간 동안 함께 잘 지내면 좋겠어요 :-) 고맙고 늘 미안해요.
많은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며 본인들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죠. 자기들이 그렇게 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정당화를 하면서 말이에요. 그동안 제가 배운 건 '참으면 호구된다'와 '나를 챙기는 사람은 나뿐이다'였습니다. 지금도 위 두 가지는 잊지 않고 지내고 있어요. 언제라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확실히 다른 곳에 비해, 소위 '평범하다'고 하는 곳에 비하면.. 비교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로 이곳은 좋아요. (물론 어느 곳이나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ㅎㅎ)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한 꾸준히 지속 가능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돌고 돌아서 우리 이렇게 만났네요. 그냥 저는 지금 일화 씨가 여기서 잘먹고 잘자고... 요즘은 잘 소화시키면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소망합니다. 멋쟁이 (짝짝짝) 대잔치(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