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할 이야기는 아닌 것들

한나
2019-03-29
조회수 328

내가 목포에, 괜찮아마을에, 그리고 공장공장에 오기까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할 이야기는 아닌 것들




꼭 이걸 적어야 할까

그래서 구체적으로 적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쓰게 돼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기에 적어본다.


공장공장, 여기에 오기 전의 이야기를 조금 적어본다.

어제 내 취향의 신나는  뚱땅뚱땅거리는  노래를 찾았는데

지금은

그때 그 시절에 내가 제일 많이 듣던


타블로의 열꽃 앨범, 그리고 그때 들었던 음악  들으며 적는다


아직까지 다 잊었다고 하기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금이 간 시계에 건전지를 갈아 끼우면 돌아가긴 하지만

시계에 금이 간 건 누구나 볼 수 있으니까.


뭔가 달라졌고

내가 내가 낯설고

표정이 예전보다 어두워졌다.



모르겠다. 아직까지 내가 여기 있는 게 실감이 날 때도 있고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때 그 일들이 내게 안 일어났다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17년, 그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내 세계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그럴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그랬을 때.

그 충격이 참 컸다.

생에 처음으로 경찰서를 가고, 고소장을 접수하고, 뭐 그랬다.

그냥 담담히 써내려가고 싶은데 자꾸 감정이 올라온다.

힘들었다. 아주 많이.

그 일이 일어나기 전날은 아주 즐거웠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부터, 미래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어난 일은 정말 정말,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 나의 변화였다.

나쁜 색깔의 감정들이 나를 덮었다.


나쁜 습관을 시작했고, 툭하면 눈물이 나왔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일상이라는 건 얼마나 큰 힘이 들던지.

그 전에 쉽게 했던 것들이 어려웠다.

예를 들면

컵을 들다가도 손이 떨려서 떨어트리고

갑자기 속에서 화가 올라와서

나쁜 생각을 아주아주 많이 했다.

밤마다 원망을 하기도 하고, 자책을 하고,

책도 읽고,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그렇게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즐겁게 떠들고, 격려하고 지지하는 걸 좋아했는데

내가 힘이 안나고, 부정적인 기운이 있으니

나를 아껴주는 친구들을 멀리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나를 사람들 만나기를 힘들게 했다.

‘너는 그런걸로 힘들어하는 구나, 차라리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더 동굴속으로 파고 들었다.

뭐가 그렇게 잘못했을까?

내 인생이 갑자기  왜이렇게 꼬일까?


대학교 때는 눈이 반짝반짝 거린다는 말도 자주 듣고

열심히 살았는데.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는데.



누군가에게 그때 내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속도로에서 잘 운전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차 옆으로 와서 콱 박아버린 버린 느낌.


아무튼 그렇게 설명한 나에게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한나 씨는 그런 사고 후에 어떻게 할 거예요?”

“아마 보험처리를 하고, 병원에 가고, 쉬다가 다시 제 갈 길을 가야겠죠?”

“네, 보통 그렇게 하겠죠. 근데 지금 한나 씨는 그 차를 쫓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랬다. 나는. 정말로. 모든 신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계속 생각했다. 그 사람은 지금 잘 자고 있겠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라며.


지금 생각해보니 살면서 화를 내본 적이 몇 번 없다.

싸우기보다는 평화롭게, 웬만하면 좋게 돌려 말하는 편이다.

그런 내 몸은 큰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떠났다.

 떠난 곳에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함께 왔다.

나는 잘 참는 편이다.

그냥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생각을 몇번이고 한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또 떠났다.


나는 또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말하고 답변을 들었다.


“한나 씨에겐 짧은 시간에 이벤트가 많았어요. 그래서 힘든 게 당연해요.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안 힘든 건 멘탈이 강한 게 아니라 좀 이상한 거예요.”


그랬다.


나는 정말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다.

불타버린 집에 더 있기는 힘들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한테도 이해 받지 못하고, 나도 나조차 이 상황의 내가

이해가지 않았다.

그렇게 괜찮아지려고 발버둥 쳤는데, 자꾸 이상했다.

꾸준히 공부를 해도 불안했고,

누워 있어도 불안했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 시기에 발견한 ‘괜찮아마을’ 공고.


- 지치고 실패했지만 다시 한 번 도약하고 싶은 당신

- 실력과 가능성을 가졌지만 등 떠밀어줄 누군가 필요했던 당신


다른 문구들도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온라인 상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본다.

김송미, 홍동우.



송미님에 관련한 이야기는  내가 홍대에서 살다시피, 살기도 했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홍대 거리를 참 좋아했다. 특히 연남동을 싸돌아 다니며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동네 사장님들과 안면을 트기까지 이르렀을 때.

당시 만나던 친구가 그럴 정도면 아예 홍대에 집을 구하는 게 맞지 않냐고 얘기를 했다.

집에서 홍대 까지는 2시간 반, 일주일에 3~5번을 그렇게 갔으니.


하루만 연남동을 안가도 사장님들이 한나 씨 요즘 바빠요?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알게 된 서포터즈 활동.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문화예술을 좋아하고, 홍대를 사랑하던 나에게

아티스트들을 지원하고, 홍보하는 활동을 하는 그 곳에서

나는 참 많이 웃었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리고 6개월의 서포터즈 기간이 끝나고, 나는 우울해졌는데

그렇게 아쉬우면 또 하면 되지 않냐는 말에

재신청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같은 서포터즈를 3번이나 하게 된다.

최우수 서포터즈 상도 받고, 신나게 아티스트들 인터뷰도 하고, 촬영도 하고, 공연도 보고 신났었다.


그러다가 담당을 하시던 과장님이 나에게 지나가듯 한 마디를 해주신다.


한나 씨가 참 좋아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 영상 한번 봐보라고.

그 이후에 페북 친구를 걸어서 보고 있었다.


그분이 송미 감독님.

괜찮아마을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한다.


내가 잘 따르고 멋있다고 생각하던 분이 추천한 사람이라서

믿음이 갔다.


그리고 동우님. 지금은 동우 씨,

( 공장공장은 ㅇㅇ님이 아니라 ㅇㅇ 씨라고 꼭 부르라고 한다...대표님이라도... 나도 ㅇㅇ 씨에 익숙해 지려 노력 중이다)


대학교 때 반짝였다고 한 건.

내가 들어간 대학교에서 나를 참 예뻐해 주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KBS PD를 하시다가 교수님이 되셔서 그런지 실무도, 이론도 참 재밌게 가르쳐 주셨다.

신문방송학과나 광고홍보학과에 막연히 가고 싶던 나는

그 두 가지를 합친 과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과에 들어가고, 그 전부터 하고 싶었던 광고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된다.

동아리에서 광고 잡지를 만들게 되고, 어쩌다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인터뷰를 하다가 원고 제의가 들어와서 쓰게 됐는데, 그게 책으로 나왔다.

‘스펙보다 스토리를 가진 청춘들’이라는 ‘덕후거나 또라이거나’라는 책이다.

이 책의 공동저자로 알게 된 사람이 동우 씨다.

책이 나온 뒤에 너무 신기한 마음에, 그리고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담당자분 께

공동 저자들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개인정보 상의 이유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일일히 책에 나온 사람들의 SNS를 검색해서

친추를 걸었다.

약간 지금보니 덕후 같은 기질이 있군요.


아무튼 그래서 동우 씨 페이스북을 보고 있었다.

그는 전국 여행을 같이 가자는 모집을 자주 하고

재밌는 작당모의를 하면서 지내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가야지, 언제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타이밍이 자꾸 안 맞아서 못 갔다.


그런데 송미님, 동우 님이 똑같은 공고를 냈다.


‘괜찮아마을 1기 모집’




나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흥미로워 보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무기력한 일상에 빠져있던 나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들었던 문구들.

믿을만한(추천받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만드는 마을.


그렇지만 인생은 쉽지 않았다.

지원서라면 자고로 자신 있게, 나의 반짝이는 면을 보여줘야 하나


힘든 상태였던 나는 그런 나의 나름 ‘괜찮았던’ 부분들을 보니

지금의 나와 비교되면서 더 힘들었다.

저 때는 그렇게 밝은데 지금은…

저 때는 진짜 행복했지 지금은…


뭐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지원서 마감일.

시간은 자꾸 가는데,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후기들을 덕후처럼 읽는 근성이 있다.


괜찮아마을에 대한 모든 것들을 찾다가


괜찮아마을의 또 다른 기획자 명호 씨의 블로그를 보게 된다.


괜찮아마을을 만드는 과정, 만들기 전 이런저런 글들이 있었다. 모조리 읽었다.

그러다가 읽게 된다. 힘든 일을 겪었고, 그런데도

지금 이런 예쁜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 모습을.


나는 이상하게 여기서 마음이 크게 동했다.

나도. 나도 여기에 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지금 무척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고,

힘들어서 나쁜 생각은 많이 하고 있지만

남한테 나쁜 일을 할 생각은 못 하는 나. 


마지막 힘을 다해서 지원서와 포트폴리오를 내버렸다.

지원만 하자. 지원만 하자. 포기하지 말자 라고 생각한 내가 지금 생각하니 기특하다.



그리고 괜찮아마을에 입주하게 된다.

2018년 8월 28일

까먹을 수가 없다.


모든 게 신기했고, 낯설고, 어색했다.

6주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들을

여기 와서 하게 된다.

‘패피포토’라는 내가 그냥 좋아서 찍는 사진들을

동네 어르신들의 멋을 담는

‘멋쟁이 대잔치in목포’라는 프로젝트로 하고

사진전까지 열었다.


나와 다른 부분에서 꼼꼼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내가 잘하는 부분에서는 나의 강점을 쓰면서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날들이

‘내일 ㅇㅇ를해야되니까 오늘은 일찍 자야지’

라면서 조금 계획적으로 살게 되었다.


물론 천성이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건 쉽게 바뀌지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편해져 갔다.




내가 그전에 아프다가 왔다는 걸 까먹고 무리해서

몸살이 날 때도 있었고

생각만큼 안 될 때는 분해서 속상해하기도 하면서

귀여운 감정들을 다시 찾게 된다.


첫 만남에 바다를 보러 가자고 걸어갔던 사람들

명절에 혼자면 심심하니까 만두를 해 먹자던 사람들

갑자기 야경을 보자며 번개를 치는 사람

자기가 아플 때 쓴다면서 마사지 링을 주고 간 사람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상담소를 연 사람들

사람들을 담고 싶다면서 사진을 많이 찍던 사람들

노래를 만들어서 지금의 우리를 기억하던 사람들


그렇게 괜찮아마을  6주가 끝났는데. 나는 왠지 끝이 난 느낌이 안 들었다.

기억이 난다. 

은혜 씨가아쉽다고 했는데

나는  “뭔가 계속 볼 것 같은데요…?” 라며 다 같이 살면 안되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밤거리, 네온, 반짝 거리는 걸 참 좋아했다. 



원래는 도시의 반짝거림을 좋아하고, 밤거리의 빛을 찍는 걸 좋아하던 내가

한적하고, 정이 많은 이곳의 동네 주민들과 알아가고

나도 이곳의 동네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예전에 홍대를 쏘다닐 때면, 나는 왜 이렇게 ‘남의 동네’에 관심이 많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동네가 내가 궁금해할 그 동네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남아 있다 보니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했다.

괜찮아마을의 프로젝트들의 단기 식으로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충당이 됐는데 이제 집을 구하고 여기에 살 마음이 드니

조금 더 오래 일을 할 곳을 찾게 된다.


그렇게 그렇게 공장공장까지 왔다.



어떻게 보면 ‘어쩌다가’ 이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아주 많은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인연을 만들어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라고 생각한다.


회사는 30살 전까진  안갈거라고 그때까지 놀아보고 되면

계속 놀 거라고 얘기했던 내가.

단기 아르바이트로  짧게 짧게 일했던 내가,

어떤 이유로, 이제 돈을 벌어야 할 생각이 들었고.

회사를 간다면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던 나는

동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어려울 때도 있다.

불안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 하는 게


‘날 이렇게 오래 일하게 한 회사는 네가 처음이야’

라는 생각이다.


(저의 ‘오래’는 여러분과 무척 다를 겁니다)


공장공장은 실험주의자를 양성하고 지지한다는데,

요즘은 실험주의라는 말을 안 쓰는 것 같지만 나는 느낀다.


이게 바로 실험 아닌가.

로망가, 모든 아이디에 Romantic 이 들어갈 정도로

로맨티스트인 김한나를  일하게 만든 회사!!! 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생각한다.

처음 여기까지 오기 전의 이야기를 쓰며

너무 마음이 안 좋았는데.

점점 최근으로 돌아오면서, 웃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인생에서 충분하지 않나? 웃을 수 있는 공간에 있는 것)


더 나아지고 싶고, 나아질 거다.

(너는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는 말도 참 좋다)


여기까지 쓰면서 조금 알 것 같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여기에 온 것도


이러려고 왔나 보다.

조금 더 나아지려고!


어 음 끝을 어떻게 내야 하지.


긴 글 읽으신 분이 있다면 고맙습니다.

그리고 서툴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차차 저의 매력을 알아가실 거예요.


사…. 사는 동안 많이 법시다! 사랑해요! 공장공장!

공장공장이 잘돼야 청년들이 산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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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상 ‘공장공장’ 이곳까지 제가 오게 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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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씨랑 같은 방에 살 때, 서로가 겪었던 아픔과 슬픔에 대한 얘기를 정말 많이 했었는데.. 심지어 그 짧은 6주 안에도 또 많이 힘든 일이 생기도 했고,,, 그래서 그때는 우리가 엄청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바로 마음을 완전히 활짝 열어버렸지요. 비슷한 아픔이 많다고 느껴서 우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음. 내가 목포에 남을 마음을 먹게 하는 데도 당신과 리오씨의 영향이 정말 컸는데, 허허. 멋쟁이 대잔치는 정말 감동이었지. 이제는 영감탱 당신과 같이 산지도 8개월, 나랑은 생활패턴도 다르고, 말하는 모양도 다르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도, 애정을 갈구하는 방식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고, 뭐가 다 다른 것 같지만,, 그만큼 그대를 많이 알게 된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감탱,, 눈꼴시려울때도 많지만,, 그래도 영감탱을 알게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내가 이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응원한다. 진짜로. 그리고 처음 봤을 때는 진짜 언니인줄 알았다. 왕언니. 지금은 왕애기.
불안은 당연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안 자체가 그렇게 나쁜 감정도 아니라고 보고요. 자연스러운 방어기제고 때문에 오히려 준비를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죠. 물론 불안을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지만요.. ^^;
한동안 '관심이 없고 마음이 없는'이란 말을 마음에 두고 꺼내 쓸 때가 있었어요. 정말 마음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아마 이 일상이, 이 마음이 얼마나 게속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요.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지내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면서 지내게 되더라고요 :-) 아픈 마음 나눠서 반이 되고 다시 반이 되게 만들면서, 더 재밌게 지내보자고요 :-)
바다를 보자며 모르는 길을 걸었던 그때.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던 그때의 우리. 찻잔 모양의 캐릭터를 한 간판이 귀엽다며 웃었는데 그 다방 근처에 살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목포에 와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던 그 시간이 저도 잊혀지질 않아요. 한나 씨가 만들어준 시간에 감사해요! 늘 사랑하고 응원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