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거겠지 '목포에서 나의 일년'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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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해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리며 나는 말했다.

"저는 이제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공장공장을 떠나요"


헤어짐 앞에서 이렇게 많이 울게 될 줄 몰랐다.

이곳이 싫었다기보단, 나의 삶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이 문장을 만났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뭔가를 바꾸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변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포는 나에게 소중한 곳이 되어 버렸고,

소중한 사람들이 한가득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2019년 공장공장을 시작하며 함께 찍은 우리들의 사진)




솔직히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덕분에 다이어트 약을 먹어도 빠지지 않던 살이 6킬로나 빠졌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고민을 해도 고민의 답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머리로 하는 고민은 어떠한 답도 알려주지 않는다.


가치관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오히려 서로가 안 좋은 상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되었든  우선 하나의 선택하고 결정했다.

그렇다 나는 떠나기로 했다.

익숙해진 이곳에서 떠나 변화를 나에게 주기로 했다.


그 결정이 어떤 결과로 나에게 다가올지 지금은 모르겠다.

뭐가 좋은 선택인지 나에게 어울리는 선택인지

이 선택이 나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잘 모르겠다.


이런 나에게 그대들은 안아주었다.

다 괜찮다며 괜찮다고 연진 씨는 무엇을 해도 잘할 것 같다고

그러니 만들어가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짐 정리를 하는 나에게 명호 씨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말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을 정리해보는 것은 어때요?'

서두가 길었다.

나는 지금 나의 일 년이라는 시간을 정리해 보려 한다.

 






Part 1. 왜 나는 공장공장에서 일하기로 했을까?



27살 늦은 나이에 처음 회사를 들어갔다.

왜 그렇게 늦게 회사에 들어갔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 특이하고 이상한 아이는 맞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없어서 회사에서 해줄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싶었고

내가 가진 역량으로 세상을 조금 더 멋있게 만드는 일을 하는 곳을 가고 싶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와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이상주의자였다.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이제는 조금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ㅎㅎ)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은 환상과 이상적인 생각을 채워준 회사를 찾았다


그렇게 처음 간 회사는 내가 가본 행사와 모임 교육을 운영하는 곳 중에서

모든 행사에서 '결정적 순간'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마음이 항상 울컥 울렁울렁이게 만들 줄 아는 멋진 곳이었다.

집에 돌아가도 그 순간들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울리는지 알고 싶고, 배우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왜 시작했냐고 물으면,

'결정적 순간' 때문에 공장공장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이란?

책 '순간의 힘'에서 말하는 단어로 우리의 기억 속에 유난히 도드라 지게 새겨진 의미심장한 경험을 가리킴

삶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매 순간으로 구성되는데, 결정적 순간은 그중 가장 오래 살아남아 기억되는 것이다. 

연구조사에 의하면 고양, 통찰, 긍지, 교감 4가지 요소가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part 2. 당신들과 함께 만들었던 '결정적 순간들'



나의 29살 목표는 통장 잔고 0 만들기였다.

가진 것도 없지만 그마저도 다 없애 버리고 0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이었으면 멋있었겠지만....

사실 미래 걱정과 불안에 작아져 버리는 나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씌워버린 거였다.

그럴싸한 말로 나를 속이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독일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이집트 다합까지 3개월 여행을 하고

통장에 100만 원 남겨 넣고 한국에 돌아왔다.

돈도 없지만, 부모님이 이대로 왠지 세계여행을 떠나서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매일 밤 나에게 문자와 연락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한 일은 동태 눈깔로 취업사이트를 뒤지며 무엇을 해야 하나 검색하는 일이었다.

그냥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건 사치 같았다.

그런데 행동과 상반되게 마음은 '아.. 회사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나현이가 전화가 와서 말했다.

"언니 놀고 있으면 나랑 같이 목포 괜찮아 마을에 같이 갈래요?

가서 한 달만 함께 놀고 지내고 돌아오자!"

"괜찮아마을? 엥? 그게 머야?"

"찾아와 찾아봐~ 언니같이하자 재미있을 것 같아!"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싶은 다 큰 청년들을 위한 마을이라니!

충분히 쉬고 난 뒤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작은 성공을 해보라니


'6주간 지내면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봐야겠다!

쉬기도 하고 프로젝트도 하면서 여행으로 붕 뜬 마음도 가라앉히고 일도 시작해야지!'

특별히 기대하지도 않았고, 이 경험 나의 삶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우리의 수료식 날을 기획과 운영을 해줄 수 있냐는 동우님과 명호님의 부탁에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 잘하고 싶어졌고

모든 이들이 이 시간이 참 귀했구나를 느끼게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30명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30명 모두에게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명호씨는 이 정도까지 부탁하지 않았는데 나혼자서 열심히 프로그램을 바꾸었다.

프로그램에 형식을 바꾸고, 노래를 선정하고, 동선을 체크하고,

한숨도 자지 않고 인터뷰를 따서 영상을 만들었다.




수료식 당일 축제처럼 모든 이가 자신만의 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서로에게 선포하고

서로의 시간과 고마움이 담긴 소감문 영상을 보고 난 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예상한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 되었다.

그런데

.

.

.


어린아이처럼 찡그러진 얼굴과 나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서

떨리는 목소리와 흘러내리는 눈물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박진영의 공기 반 소리 반이 이런 건가 하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방문을 열어서 함께 밥 먹자 놀자며 수다를 떨고

서로의 반짝임을 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줬는데 그게 좋다고 말해주는 시간들이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그 기분을 느낀 그 시간이 말이죠"


얼마 만이었을까?

먹고사는 생계. 나이, 직업.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냥 나로서 바라봐 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것은

아마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몰라도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로 돈을 벌고 있는 거지로 만 사람을 바라보는 이야기가 가득 찼다.

그런데 이곳에서 우리는 돈과 생계에는 전혀 상관없어도

내가 어떤 취향이고 어떤 성격이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것이 서로의 가장 큰 관심사고 서로를 배려해주는 그 시간들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우린 괜찮아졌다.

겉에 껍질이 아닌 마음 나라는 사람을 봐주는 그 시간들이 난 고마웠다.


아마 내 삶에서 절대 잊지 못할 결정적 순간이었다.

수료식 3시간을 위해서 이틀간 밤을 새웠던 것도

잠을 한숨 자지 않고 영상을 만들어 갔는데

이상하게 아드레날린 때문에 몸이 피곤한지도 모르고 그 시간을 만들었던 것도

함께 해준 30명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안아주고 고마웠다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좋다 '



나는 바로 떠나지 않고 목포에 조금 더 남아서 지내보기로 했고

동우님과 명호님과 함께 괜찮아마을 2기를 함께 운영하기로 했다.

나는 이 결정적 순간들이 나에게 의미 있었던 만큼

 다시 올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삶에서 가치는 있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했기에 함께 했다.

그래 모든 건 괜찮아마을에서 6주간 지내면서 함께 만들어갔던 '결정적 순간'들 때문이다.


 








 




part.3 공장공장에서 이런 시간들을 보냈지


하나.괜찮아마을 2기 운영, 그 시간의 가치를 아는 18명이 한마음으로 나아갔던 그 시간

어떤 정신으로 11월 12월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다만 괜찮아마을 2기 분들이 우리가 경험했던 그 순간들을 경험하길

우리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그렇게 지내게 만들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 잠이 들어서 내일 아침에 깜짝 놀라듯이 일어나서 로라를 가고

그다음 프로그램을 위해서 관계자분들을 만나고 프로그램에 맞는 환경을 조성하고 프린트물을 만들고 아카이빙하고

조금 더 우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저녁밥을 대접하고 이야기했다.

6주간 잘 쉬고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 개하고 작은 성공을 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쉬고 나를 돌아보고 도전하는 시간들을 만들어주는 것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 '시간'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과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해야 하였기에 더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이 프로그램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당연한 거인데

누구에게는 왜 쓸데없는 것에 돈을 쓰느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린 그 누구보다 정직하게 돈을 쓰고 기록하려고 애썼다. 

우리가 일을 할때도 그 누구보다 몰입해서 일을 하였다.


그래도 함께 했기에 끝까지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의 가치는 지금 우리가 서로를 보면 애틋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무언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이미 증명이 된 것 같다.

우리는 분명 변했고 6주를 경험하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까.








둘. 함께 더 해보자고 했다.

동우 씨와 명호 씨가 일이 끝나갈 때쯤 진지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

왜 이곳에서 더 일하고 싶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그 말이 그냥 좋았고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였고

그것을 그들과 좀 더 함께 일하면서 만들어 가보고 싶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들의 그 믿음이 좋았나 보다.


무엇을 하게 될지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지만,

'연진 씨가 잘하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 

이 두개의 접점을 잘 찾아서 만들어가자는 그 말이 좋았다.


찾아보니 은근히 명호씨와 찍은 사진은 많은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동우씨와 사진이 없다. 

우린 그런사인가봐 애증의 관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 밥을 함께 많이 만들어 먹었더라구요 ㅎㅎㅎ)





셋,'괜찮아마을'을 알리다

괜찮아마을 프로젝트를 끝이 났지만

우리는 계속 이 마을을 만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핀드혼공동체처럼 그 공동체를 알리는 일을 했다.

지자체와 협동조합과 대안사회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워크숍을 운영하기로 했다.

동우씨가 잘하는 목포 원도심 투어를 속성으로 배우고 업그레이드했다.

밤을 새워서 프로그램을 라인을 만들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홍보콘텐츠를 만들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기도 하고 쉽지 않았다.

완벽보다는 완성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더 좋은 글이고 어떤 글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반응을 할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기획을 엎고 다시 쓰고 다시 엎고 회의를 하는 나날이었다.

동우 씨는 이야기했다

"우선 무엇이든 올려놓고 수정하는 게 제 방식이에요"

나는 동우 씨 말대로 우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명호 씨는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요~매력적이지 않아요"

그렇게 홈페이지 띵동란은 엎어지고 수정되고 여전히 변화 과정 중이다 ㅎㅎㅎ


덧,

룸메이트 민지와 함께 팜플렛 작업을 했다.

작업을 약 2-3주 후 팜플렛이 우리에게 왔을 때

신나는 표정으로 나에게 팜플렛을 보여주는 그녀가 참 귀여웠다.

(팜플렛 초기 기획 ..ㅋㅋㅋ 한 5번 바뀌었나..ㅋㅋ)

사진도 찍으러 가고 그 사진으로 포스터도 만들었지 ㅋㅋ






넷, 다양한 워크숍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가능할까? 이를 궁금해하고 워크숍을 오는 곳이 있을까? 불안했던 나의 마음과 다르게

6개월 동안 40여 개의 팀을 만났다.

덕분에 도시재생, 협동조합, 대안 공동체 관련 기업과 단체들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에 사회혁신에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들의 니즈를 따라서 프로그램을 수정하고 업그레이드하고

수업 장소를 세팅을 바꾸고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이야기도 그 과정에서 업그레이드되고,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책상에는 수많은 명함들로 가득 찼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 더 좋은 방향으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다섯,다양한 워크숍을 기획 운영하다

점점 나는 말을 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어느 날은 혼자서 강의부터 투어를 끝까지 진행하기도 했고,

영범 씨와 약 열흘 동안 밤을 새워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일박 이일 프로그램부터 이박 삼일 프로그램을 돌리기도 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부족함을 많이 마주했다.

더 잘 만들고 싶은데 머릿속에 아는 게 없어서

더 많이 배워올걸, 더 많이 워크숍 다녀볼 걸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좋은 걸 전하고,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그런 시간들이었다.


(워크숍 사진 찾기 힘드네요..? 다른 곳 간 사진은 많은데 ㅋㅋ)





여섯, 다양한 시도를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목포를 위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자는 그 말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을 만들어 낼지 우리는 열띠게 회의를 했다.

한나 동우 연진 우린 무언가 만들어 내고 싶었다.

1시간의 회의가 항상 3-4시간까지 길어졌다.

새로운 타깃층에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알 수가 없었다.

동우 씨가'연진 씨 티브이 나오게 하는 게 목포에요"

이 말이 참 고마우면서도 부담이 되었다.

그냥 여행 프로그램 말고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하고 돈 쓰고 싶은 여행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어렵다.

무엇이든 실행해보기 전까지 알 수 없겠구나를 배웠다.


괜찮아마을이 다시 시도하고 싶은 청년들을 위한 마을이었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시간을 '청소년'들을 위해서 만들어 보자고 했다.

실험주의자를 준비했었다.

레크리에이션부터 교육 프로그램들을 참 많이 찾아봤다.

그러자 영범 씨는 말했다. "연진 씨 안에 다 답이 있어요"

'나도 아직 흔들리는데..? 무엇이든 될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은데?'

이런 내 마음과 다르게 '실험주의자'팀들은 끝까지 시도를 했다.

그래서 실험주의자는 이름처럼 계속 실험을 이어갈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장 무겁고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프로젝트


(이제 들어갈 수 없는 구글드라이브 엄청나게 파일을 올렸는데 내 컴퓨터에 하나도 안남겨두었다 ㅋㅋㅋㅋㅋ

괜찮아 하하하 내 머릿속에 남아있겠지 )

(마지막 전체 회의 시간 때 )




일곱,괜찮아마을 '우리 그때처럼 놀자, 홈커밍데이'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떠나가는 나를 위해서 동우 씨와 명호씨는 이 행사를 부탁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처음 부탁받았을 때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왠지 입에서 노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닥까지 내려가 있는 체력과 에너지를 긁어모아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했는데..

행사 당일 난 또 언제 그랬냐는 신나게 놀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어 주며 도와주었다.

공간 대여에 츤츤과 과장님, 포스터와 현수막에 조셉, 프로그램 준비에 진아님, 프로그램 홍보에 한나,

훌륭한 공연에 목포 스타 부또황과 괜마뮤지션,

굳이 호주에서 선물을 보내며 마음을 전해준 나무님과 괜마 1기 2기 친구들,

마지막으로 동우씨와 명호씨의 든든한 지지 덕분에 마음이 따뜻하게 행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일 년간의 목포의 삶도..


나는 노래도 부르고 울뻔도 했던 그날 

시작했을 때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끝나고 찍어서 다들 사라졌다 ㅠㅠㅠ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과 회의와 프로젝트들

적어내려가면 너무 많지 않을까?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린 눈에 불을 켜고 주어진 것을 잘 하고자 했으며,

그 시간들을 더 가치있게 더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했다는 것



(난 프로 야근러였다 좋군)




 




part.4 난 공장공장과는 헤어지지만, 여전히 괜찮아마을 청년이니까~



그대들은 표현방식은 다 달랐지만

이런 말은 나에게 계속해주었다.


"언제든 무엇이 되었든 괜찮으니,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도 괜찮아요"


그대들 말 때문에 더 떠날 수 없었고,

더 오랫동안 마음이 무겁고 뜨겁고 뭉클했다.



작년 처음 내려갔을 땐 목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지 몰랐다.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될 줄 도 몰랐다.

덕분에 나에게 목포는 단순히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한 공장공장이라는 두 번째 직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괜찮아마을이라는 마음의 고향이 있는 곳이며,

좋아하는 친구들이 멋지게 살아가는 곳이고,

나를 많이 나답게 성장시켜 준 곳이다.


그대들이 있어 담담하게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었는데 다 못 전해서 이렇게 글을 남겨요.

분명 말로 전하면서 백퍼 못생기게 울 것 같아서.. 그러면 당신들에게 놀림당하니까..?









p.s

여전히 소연진은 괜찮아마을 청년 출신답게 방황 중이다.

방황하는 자 길을 잃은 것 아니라는 문구가 자주 생각나는 요즘.

나는 좌절이라는 단어를 삶에 가져와 경험하고

나의 작음을 마주하기도 하고,

타인의 위대함을 볼 수 있는 겸손함과 시선이 생겼고,

훌륭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문구를 스스로에게 내밀고 있다.


사회에서 내보일 수 있는 것

그러니깐 눈으로(성과, 수치 성공) 보이고 돈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삶을 뒤흔드는 것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생각한다.

그것이 삶을 흔들고 무너트리기도 하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누군가의 말이

어린 적에는 '네~ 그렇죠'라고 대답했고, 뻔한 말을 하네 생각했는데 

진정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마음은 엄청난 거였구나를 경험하고 있다.



어린 왕자는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그대들을 만났으니

그대들이 나의 삶에 들어왔었으니

그것으로도 나의 일 년이

나머지 삶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라 믿는다.


곧 봐요 친구들 :-)

 




(마지막 사진은 우리들의 사무실 로라에서의 나 추운겨울함께 일했는데 지금 돌고돌아 가을이 찾아봤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본 꾸베씨의 행복여행 문구를 함께 나누어봐요 

친구들 행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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