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마을을 떠나며 주머니에서 꺼낸 것들 2

알록
2020-01-23
조회수 1185

무궁화호 4호실, 카페테리아

“여기에 이런데도 있었군요?”
나는 L씨 옆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 좋죠? 테이블도 있고… 저는 이 칸을 자주 이용해요.”

L씨는 기차에 오르기 전에 S씨가 챙겨 주었던 음료수를 마시며 말했다.


기차 내 4호실은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카페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곳엔 양 창쪽으로 기다란 의자와 기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지하철에 있는 의자와 같은 긴 의자와 큰 자판기 하나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기차 내 이동식 간식차가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난 좌석이 좀 불편하네요. 매번 현장 구매만 하다가 온라인 예매는 처음 해 봤는지라…S 씨처럼 좌석을 선택할 수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저도 좌석을 선택할 수 있는지 몰랐어요.” 

“그렇죠? 그 페이지는 도대체 어디 있었던건지...그런데 반전이 있어요.
S씨는 정작 원했던 자리와 정 반대 자리를 예매했다지 뭐예요. 하핫.
맨 앞자리를 맨 뒷자리인 줄 알고 예매했다고 하더라고요.”

누군가의 난처한 실수는 누군가에겐 재미있는 대화에 요긴하게 쓰이는 소재가 되곤 한다.

조금 전에 "뒤에 짐을 놓으려고 뒷자석을 예매 했는데 와서 보니까 앞좌석이더라구요"라며 황당해 하던

꼼꼼한 성격인 S씨의 난처한 표정은 어쩐지 좋지 않은 컨디션의 나를 또 한 번 웃게 했다.


F씨는 그를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고 싶은 남자라고 했다.

괜찮아마을 프로그램의 마지막 밤이던 전 날 밤,

S씨는 이전에 B씨가 3기 숙소에 기증했던 노래방 마이크를 들어 포켓몬스터와 디지몬어드벤처 등등의 갖가지 노래들을 열정적으로 불렀는데

그 모습을 보던 F씨는 그를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고 싶다고 했다.  엔도르핀이 필요할 때 꺼내 보고 즐거울 것 같다고..

그래서 괜찮아 마을에서의 마지막 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주머니 속 휴대폰에 담겨있던 사진첩을 꺼내 보았다.

괜찮아 마을에서 지낸 12주 동안, 내 주머니에는 어떤 기억들이 담겼을까?

등대게스트 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날, '주머니남'은 열창 중


괜찮아 마을에 입주하는 날 나는 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같이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마자 캐리어 한쪽 바퀴 쪽에 금방 떨어져 나갈 듯 덜렁덜렁거렸다.

“아! 젠장!” 하고 내가 말하니, 옆에 있던 엄마가 말했다. “여태껏 버틴 것도 대단한 거지…”

하긴 2019년 한 해의 대부분의 시간을 어마어마한 무게의 짐들을 싣고 집 없이 떠돌아다녔으니... 

올 해 주인 잘못 만나서 엄청난 고생한 녀석이다.
목포역에 내리니 그 녀석은 절뚝절뚝 걸으며 “정말 이제 더 이상은 못 가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다루며 그 녀석을 어르고 달랬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론 이렇게 무리하게 일 안 시킬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괜찮아마을 집합장소이자 숙소인 춘화당은 목포역에서 지도 상에선 4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서 1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캐리어 바퀴 살피랴, 지도 보랴, 전방 주시하랴 몇 걸음 가지 않아 계속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느라 도통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정말 이런 곳에 그런 한옥 숙소가 있다고?.. 흠.. 잘 못 가고 있는 거 아냐?” 하며 멈춰 섰을 때

어떤 젊은 여자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괜찮아 마을에…”

“아, 예!”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준비한 듯, 목에 건 네임카드를 보여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괜찮아 마을 주민 Z라고 해요."

나도 인사했다. " 아, 안녕하세요. 숙소는 여기서 멀까요?"
그녀가 답했다.
"금방이에요. 길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 가시면 위에 민트색 간판이 보이 실꺼예요.
거길로 가시면 되요."

밝고 친절한 에너지의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공식적으론 Z씨,그녀가 나에게 <괜찮아 마을>의 문을 열어 준 셈이었다.   


괜찮아마을 3기의 첫번째 숙소, 춘화당 간판


Z씨가 안내해 준 대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었다.

“다 왔다! 수고했어!” 

<춘화당>이라고 한자로 적힌 민트색 간판 아래 멈춰 서서 나는 캐리어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공장공장 직원들의 괜찮아 마을 3기 주민 맞이 준비가 한참이였다.

그러나 나는 선뜻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 계단이 웬 말이란 말인가…”

판판한 평길을 가는 것도 힘에 부쳐하던 이 녀석에게 계단까지 오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 역시 그 녀석을 안아 올릴 힘이 없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계단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그렇게 멈칫거리고 있을 때 G대표님이 오더니 내 캐리어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주었다.

“아니, 그게.. 보기엔.. 그래도.. 정말 엄청 무거울…” 한 손으로 드는 그를 보며 당황한 내가 주절주절 하는 사이, 

순식간에 그가 계단을 올라 춘화당 카페 안으로 캐리어를 옮겨주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진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기합 받는거 아님. 오리엔테이션 날, <춘화당> 앞 뜰에서... -Photo by. Rio-


잠을 못 자서였을까? 오래간만에 새벽에 일어나서였을까? 장거리 이동 때문이었을까? 오래간만에 무거운 짐을 들어서 였을까? 

입주 오리엔테이션을 듣는데 좀 힘에 겨웠다. 그런데 오리엔테이션을 듣는 나뿐만 아니라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공장공장 직원들도 하나 같이 힘에 겨워 보였다

특히나 공장공장 대표인 G님의 얼굴이 터질 것 같이 싯뻘갰다. 간단한 레크리에이션을 하면서 G님과 손을 잡았는데 손도 핫팩같이 뜨거웠다.

“음… 괜찮아 마을 관계자분들… 다들 괜찮은 건가?… ”

 "이 공간에서 중심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리엔테이션 날, <로라> 3층에서..  -Photo by. Rio-


다른 사람들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니 내 컨디션이 심상치 않았다.
어판장과 해돋이 투어 일정을 모두 소화할 만큼 크게 나쁘지 않아서 조금 쉬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차도가 없었고, 오후에 숙소 주변의 원도심 투어를 하면서 내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스마트폰 속 지도를 꺼내 볼 작은 에너지 조차 남아있지 않아 혼자 돌아갈 엄두도 내질 못했다.

그렇게 나는 방전된 상태로 G님의 인솔만을 기다리고만 있었고 

그때였다.

“알록씨, 괜찮아요?” 

J씨가 멍하니 서있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평소였음 그냥 괜찮아요 하고 웃고 말았을테지만

그녀의 물음에 “정말인지 너무 힘드네요”라는 답이 절로 튀어나왔고.

그녀는 “그럼 숙소로 가서 좀 쉬는 게 어때요?”

방금 전에 몇몇 사람들이 숙소로 갔으니까, 조금만 걷다 보면 그분들과 함께 갈 수 있을 거예요.”라며
사람들이 간 방향을 손으로 표시하며 알려주었다.

그녀의 알려 준 방향대로 걷다 보니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H님을 만났다. 

목포역 뒤의 시장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20분도 안 걸리는 1km 남짓 한 거리였지만 내게는 수천리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내 몸이 하는 말은 무시하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었고 그렇게 걷다 보니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방에 들어갔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똑. 똑. 똑 “알록님…”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방안이 어둑어둑 해져 있었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 방 문을 묻는 안부에 누워서 간신히 대답을 했다.

몸은 불덩이였지만 너무 추워서 찜질기를 끌어안았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 사람 한나 없는 숙소의 적막한 공기마저도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대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뿐이었다. 

“정말 내가 바닥이 났구나..”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이렇게 아픈 게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10대엔 새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아프곤 했고

20대엔 일을 시작할 때, 여행을 출발할 때마다 매번 아프곤 했다.

-그래서 ‘편도’만 없애면 괜찮아질까 싶어 편도 제거 수술까지 감행했었는데…-

그리고 30대인 지금…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을 뿐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아픈 걸 숨길 수 없어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도 ’ 아프다. 안 괜찮다’ 떠들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괜찮아 마을>에 내가 가져온 것 중 고장 난 건 비단 캐리어뿐만이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괜찮아 마을 3기의 전설엔 첫 공식 일정이 진행되던 2019년 10월 어느 하루, 너덜너덜한 한 캐리어와 너덜너덜한 한 여자는 그렇게 목포의 한 게스트하우스의 이층 침대 위층과 아래층에 각각 나란히 누워 요양을 했어야만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내가 6주 동안 머물렀던 별채 숙소. -Photo by. Rio-
떠나던 날 대왕 바퀴벌레가 날 쫓아냈다.


“아~ 행복하다” 

줄넘기를 하는데, 중간에 줄에 발이 걸려 멈춰 섰는데 순간 따스한 햇살이 온몸을 감싸 안아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때 마침 어디선가 참새가 노래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행복’이란 단어가 절로 맴돌았다.

“비록 통장에 잔고도 없고, 미래도 보이질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지금 나처럼 이 따스한 햇살을 즐기는 청년이 몇 명이나 될까?

지금 이 순간만 본다면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마을에 오자마자 지독한 몸살에 덴 나는, 컨디션을 조금 회복하자마자 숙소 뒤뜰에서 줄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체력으로 라면 앞으로 작은 성공은커녕 작은 실패도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가 가동을 하기 전에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줄넘기와 신나는 음악이 담긴 휴대폰만 가지고 바로 뒤뜰로 나갔다. 나의 머리는 중력과는 거리가 매우 머니까…


나는 깃털이다 나는 코끼리가 아니다 나는 가볍다

괜찮아 마을 3기들의 첫 번째 숙소인 춘화당 게스트 한옥 하우스는

아기자기 한 앞뜰과 한옥 본연의 멋을 고이 간직한 본채와 오른쪽 구석에 일반 현대의 가정집처럼 리모델링 한 별채로 구성되어있었다.

괜찮아 마을에 오기 전, 웹에서 숙소 사진들을 봤었는데 그때 봤던 멋스러운 사진들은 모두 본채와 앞뜰이었다. 그래서 별채에서의 생활은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본채에 가장 큰 방에 들어서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하지만 숙소를 선택하기 직전에 그곳이 외풍이 심하고 모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 별채로 바로 마음을 돌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였는지 멋이고 뭐고 일단 편하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눈엔 별채와 본채는 여러모로 차이가 좀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양반 집'과 '천민 집' 같다고나 할까? '마님 집'과 '하인 집'같다고나 할까?

별채가 아무리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되었다고 해도 볕이 안 드는 구석에 위치한 이상, 화사한 느낌은 없었다.
일단 본채엔 볕이 잘 들고 앞뜰엔 잔디도 있고, 푸르른 나무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별채 뒤에 있는 뜰은 좀 방치한 느낌에 가까웠다. 큰 나무조차도 영양이 부족한 느낌이였고,
작은 식물들은 죽어있었고, 잡초와 여기저기 쳐져 있는 대왕 거미 줄이 보였다.
비가 오면 어릴 때 이후로 본 적 없는 대왕 지렁이도 눈에 띄었다.
그래서 처음 보고 아무도 이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하게 되는 곳이 될 줄이야…

그 땐 "여긴 아니군" 했었는데... 이런 말이 있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알록' 속은 모른다. Photo by. Rio-

“앞 뜰엔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있는데… 난 왜 여기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는 거지?”
뒤뜰에서 잠시 쉬면서

볕이 잘 드는 예쁜 앞 뜰을 내버려두고 굳이 을씨년스러운 뒤뜰만 찾는 내가 나도 참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알록달록한 예쁜 옷은 박스에 담아두고,
할인마트에서 산 검은색 옷만 꺼내 놓고 입는 요즘의 나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긴 했다.

학창 시절,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다 훔쳐가고 막 다루던 학교 애들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나중에 학교에는 늘 가장 후진 것만 입고 가져가곤 했었는데…

어쩌면 그 버릇이 아직도 학교를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여전히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춘화당이 나만 이용할 수 있는 내 집이었다면?...”

내 선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사회와 사람들은 나를 많이 변화시킨다.
 그래서 어릴 땐,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존재들이 싫었다. 그래서 사회와 사람들과는 최대한 담을 쌓고 동떨어져 살고 싶었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해서 내 취향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하니 모두의 눈길을 끌고, 4차원이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 눈길을 받기 싫어서 소리를 듣기 싫어서 내 취향을 감추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아무의 눈길도 받지 않는 뒤뜰을 좋아하고 있었다.

“사람들 속 나는 내가 아닌 게 아니라 그 역시 나였구나…”

사람들 속에 있는 일은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앞뜰에 있었다면 이런 생각들을 못했겠지?”

중력에 눌려만 있던 몸을 바닥에서 떼어내는 일은 어쩜 늘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몇 톤 되는 코끼리 같이 느껴졌던 첫째 날에 비하면 지금은 조금은 훨씬 가벼운 동물로 진화된 것 같긴 하다. 음… 코끼리 다음으로 가벼운 동물이 뭐가 있을까?

혼자일 땐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모습... 그런 모습을 만나면 많이 당황... Photo by. Rio-

괜찮아 마을에 와서 제일 처음으로 갔던 식당은 첫날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갔던 <우진장>가는 길에 위치한 어느 백반집이었다.

한 끼에 만원인 생선이 나오는 백반집이라 해서 갔는데 잔치상이 나왔다. 

메인 메뉴는 가자미 튀김. 가자미 튀김이 메인 메뉴인데 서비스로 전어회를 받았다.

속이 부대껴 입맛이 없던 나도 이렇게 싱싱한 가자미튀김은 처음이라며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며 밥을 먹었다.

그러나 12주가 끝나갈 때 즈음 그 식당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좀 달랐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오셔서 가봤는데, 가보고 다른 데 갈 걸 후회했어요. 

옆에. 식당에선 생선을 바로 구워 주는데 거긴 차갑더라고요. 밑반찬 맛도 그냥 그렇고…”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 식당, 별로예요. 다들 맛있다고 해서 갔는데 아저씨가 불친절해서 밥 먹는 내내 기분이 안 좋았아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어쩌면, 요사이 우리들 입맛이 고급스러워진 건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먹는 만 원짜리 백반에 비하면… 하하…”

왜냐하면 우리가 있던 목포 원도심 동네는…

짜장면을 시키면 탕수육을 서비스로 받을 수 있는…

그냥 팥빙수를 시키면 더 비싼 커피 팥빙수를 받을 수 있는…

오천 원짜리 뷔페에 가자미 튀김을 무제한 먹을 수 있는…

칠천 원짜리 백반이면 십 첩 반상을 먹을 수 있는…

국숫집에 가면 낙지젓갈을 무제한 리필로 먹을 수 있는…

보리밥을 시키면 양념게장을 밑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회덮밥을 시키면 꼬막무침을 밑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는 어느 식당을 가든 늘 불만을 늘어놓기 바쁘던 내가 이 곳에선 어느 식당을 가든 엄지를 치켜세우기 바빴고,

아무리 맛있다, 좋다 말해도 아깝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긴 만큼, 그 외의 시간은 개인적인 시간을 위해 남겨 두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공동 식사 외에 따로 밥계를 하진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했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공동식사는 내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 계기가가 되었다.

뭐든 혼자 해결하는 게 편한 내게, 사람들과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요리를 하고, 함께 밥을 먹는 건

2인분의 라면을 끓이는 것도 낯선 나에게 16명의 국과 반찬을 만든다는 건 진땀 나는 도전이자, 색다른 경험이었다.

요리든 조리든 나와는 정말 무관한 활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연신 “맛있다” “맛있어요”를 반복하며 잘 먹는 사람들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들 때마다 H씨는 “그거, 알록 셰프님이 한 거예요”라며
모든 공을 나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래서 H씨가 우리 팀의 진정한 셰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공동 밥계를 경험을 하면서 음식을 하고 나누는 큰 즐거움을 알게 되어,
종종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등대 게스트의 냉장고는 마치 마르지 않는 화수분과 같았다.
곳곳에 기증 박스와 기증 칸은 넘쳐흘렀고, 덕분에 남은 사람들이 밥과 간식과 차까지 12주가 끝나는 날까지 식대의 압박 없이 잘 먹고 다닐 수 있었다.

마지막 날엔 남은 쌀을 돌리고 다닐 정도였다.

회덮밥과 장어탕이 일품인 별미식당
국산 팥으로 손수 끓인 팥으로 만든다는, 매일 먹고 싶은 <산그리메>의 명품 팥빙수

<따로 또 같이> 

이 프레이즈가 없었다면 괜찮아 마을에 올 엄두나 낼 수 있었을까?

난 2019년에 한 해를 거진 내내 게스트하우스에서만 머물렀었다.

외국에서는 그렇다고 쳐도,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귀국해서도 서울의 게스트하우스들을 돌아다닌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보이긴 하다.

어쨌든 늘 상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방을 썼었기에 단체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하진 않았을까 했는데 괜찮아 마을 생활은 또 달랐다.

단체 생활이란 게 사람들, 장소, 상황… 모든 것들의 변수의 연속이긴 하지…

호주의 게스트 하우스와 스페인의 게스트하우스, 일본의 게스트하우스, 서울의 게스트 하우스, 서울의 이태원의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괜찮아 마을에서의 게스트하우스 생활…

또 같은 도시, 같은 방이라도 유럽인, 동남아시아인, 남미인,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모두 다른 느낌 다른 분위기였더랬다.


괜찮아 마을 3기의 합숙 생활은 아마 또 한국의 어느 청년 합숙 생활과 달랐을 테고, 앞의 1기와 2기 때와 또 달랐을 테다.

하지만 1기와 2기도 시작은 똑같이 룰을 정하는 것부터 했으리라…

입주하고 첫 주는 무언 갈 정하는 연속이었다. 

방을 정하고, 당번을 정하고, 역할을 정하고… 계속 뭔가를 정했다.

우리는 거진 모든 ‘룰’들을 모인 자체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정해진 ‘룰’을 통보받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 룰’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시 돌이켜봐도 '이보다 민주적일 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구 하나도 마음이 다치질 않는 마음으로 서로서로를 배려하며 잘 해내갔다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룰’이란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나로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참 재미없고 힘든 시간이었다.

‘룰’이란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닌 ‘룰’ 구체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절차라는 걸 아는데도
그냥 사람들이 모이면 절로 학창 시절의 ‘스승의 날’의 기분이 된다.

목소리 큰 누군가 “돈 내” 하면
대체 뭘 샀는지.. 얼마가 들었는지 출처도 모른 채 돈을 내고..
“저희가 준비했어요~쌤~” 하면서 앞에 나간 두세 명은 선생님의 이쁨을 받고…

이렇듯 늘 가성비 없던 가성비 강조하는 단체 생활만 해봤던지라 

일단 뭘 같이 하자고 하면 이런 말부터 튀어나왔다.

“뭘 하고 싶고, 뭘 사고 싶고, 뭘 먹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다면 다 같이 다 함께라는 말로 덮어서 엮지 마시고 그냥 개인적으로 하세요. 난 당신의 원하는 기계의 부품이 아닙니다.”


그리고 ‘괜찮아마을’에서 지내면서 느꼈다.

이 곳이 아니었다면,  이 곳에서 배려심 있던 내 룸메이트와 3기 사람들이 아니었음
난 평생 단체생활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따로인 나를 인정해주고, 좋은 건 “알록님도 같이 먹어요~” “알록님도 같이 해요~” 라며 함께 나눠주는…

서울에 30년 살면서 만나 본 적 없는데…

정말 다들 어디서 온거지?
내가 살던 서울... 거기 맞는건가?

왕따 아님. <따로 또 같이>를 잘 실천하고 있을 뿐.. ㅎㅎ

6주가 끝날 때 우리는 저마다의 계획했던 것들을 전시장에 풀어냈었는데

전시 이름은 <작은성공>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그 전시는 <작은 실패>였다.
열심히 만들었던 진열대 제작도, 전시물도, 팀워크도, 컨디션 조절까지도..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었다.
비공식적인 내 전시회의 이름은 <단지 6주가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를 위해, 급 3년 전 그렸던 그림을 꺼낸 전시회>였다.

하지만 동료들의 작은 성공을 지켜보는 것은 내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말 참 재미있게 잘한다 했던 J씨는 그녀의 재치와 언어 실력을 글로 풀어내서 책으로 엮었고,
6주가 지나서는 2쇄까지 찍어서 책방에 입고까지 해서 정식 작가로 스스로를 데뷔를 시켰다.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난 어느새 그들의 팬이 되어 있었다.

나뿐이었을까 프로그램이 끝나갈 즈음 많은 스타들을 거닌 팬이 된 마음이…

6주가 끝나고 몇몇 동료들은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서도 6주 더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이런저런 응원에 선물을 보내왔다. 

H씨는 심지어 캐나다에 가서 작은 시도로 만든 나의 작은 카드도 주문을 해 주었다.

내가 종종 말했다. “아! 성인이 돼서 이런 경험을 또 해볼 수 있을까요?” 

그러면 J씨도 종종 말했다. “공장 공장의 분들이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참 좋은 거 같아요. “

그렇게 사람 보는 눈 좋은,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이 만나고, 좋은 시간을 갖고, 좋은 기억 많이 만들었다.

S씨의 생일파티사진 아님. <작은성공>이 끝나고... Photo by. Rio-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동료들이 물었다.

“알록씨, 크리스마스이브엔 뭐 하실 거예요?” 

나는 말했다 “그냥, 조용히 지내려고요.”

그러나 나는 난생처음 왁자지껄한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31일 날에도 여느 때처럼 차분히, 조용히, 조금은 우울하게 지낼 거란 내 예상과 달리

나는 3기 몇몇 동료들과 불꽃놀이를 보며 그 어느 때 보다 화려하게 새해를 맞이 했다.

타종 소리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불과 11주 전에 만나서 2019년의 마지막과 2020년 시작을 함께 하다니… 우리 너무 특별한 인연들 아닌가요?”

“그러게요. 내년은 우리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 J씨가 말했다

에헤라디아~ '폭죽놀이' 아니죠 '불꽃놀이' 입니다.  

12주가 끝나 갈 때쯤 내가 조금 달라졌단 느낌이 들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안부 인사를 먼저 건네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12주 전엔 묻는 안부에 겨우 대답하고 먼저 잘 다가서지 못하던 내가 아녔던가?

뿐만 아니라, 어느새 묻지도 않은 사적인 말을 털어놓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손뼉을 치며 몇 시간씩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연인을 포기 하니 인연이 오는구나. 2019년 마지막과 2020년 시작을 함께 한 뜻 깊은 인연. 


목포를 떠나기 하루 전날엔 사람들과 맛집에 가서 밥도 먹고 디저트도 먹고 길거리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함께 걷던 F씨가 말했다. “아.. 이걸 마지막 날 하네요”

그녀의 말에 내가 답했다. “그러게요. 뭘 대단하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겠다고 12주 내내 머리 싸매고 틀어 박혀있었던 건지… 그냥 진작에 이렇게 맘 편하게 다닐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내 말에 F씨가 답했다. “오늘이라도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하루라도 맘 편히 목포를 돌아다니는 여유, 이건 분명 나와 함께 동행하고, 12주 전부터 안부를 물어 와 준 따스한 사람들이 되찾아 준 것이리라…


3기 서바이벌 최종 5인 중 4인


다시 기차안...
L씨에게 내가 말했다.
 “괜찮아 마을로 오던 날에도 전 이 무궁화호를 타고 왔었거든요.” 그리고 이어 말했다.

“그땐 캐리어도 들어가는 여유 있는 맨 앞자리에 아무도 타질 않아서 편하게 왔었는데…
이번엔 좀 불편하게 가게 생겼네요.
그러고보니 그때 기차를 탔을 때 옆쪽에 어떤 여자 한 분이 타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여자분이랑 목포역까지 나란히 같이 오게 됬었는데…
그게 바로 D님이였지 뭐예요.”

그러자 L씨가 말했다.

“아! 정말요? 저는 첫날 여기에 버스타고 왔었는데, 거기서 J님을 봤었어요.

목포 버스터미널에서 J 씨가 큰 가방을 보고 괜찮아 마을 3기겠구나 생각했었어요. 

평일 대낮인 그 날, 그 동네에 큰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 젊은이가 흔치는 않으니까요.”

“와…신기하네요. 참, 그땐 누가 우리들이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 내가 말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던 누군가와의 첫만남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L씨의 목적지인 광주역까지 금세 도착했다.

“또 봐요”
그녀는 인사를 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L씨에 이어 곧 S씨도 목적지에 도착하여 나는 그가 내리는 기차의 문 앞으로 나가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그렇게 L씨와 S씨가 기차에서 내리니…

2020년 1월 7일 오전 11시 51분 목포역에서 따로 또 같이 올랐던 용산행 무궁화호엔 나만 남게 되었다.

그와 인사하자마자 나는 다시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 배야…”
내 몸이 다시 심상치 않았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기차를 타기 전 S씨가 건네 준 애플파이가 있었다.

"아...그림에 애플파이구나..."

괜찮아 마을 입주 날, 목포행 기차를 기다리며...



- 내 주머니에서 꺼낸 3기 사람들의 반짝이는 한 컷 -
(+몇몇의 공장공장 사람들) 


● “알록씨~ 사랑해~ ” -B.G-

● 내가 만든 책을 닫으며.. “어우으읍…. 알록님 우리 친하게 지내요.” -J.J-

● 큰 눈을 반짝이며 “물건을 소비할지 아닐지는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에게 맡겨봐야 하는 것 같아요.” -S.G-

● “알.록↗님도↗ 같.이∨ 드~세요오~” “알.록↗님도↗ 함.께∨ 가~실래요오?~” -L.O-

● 눈을 심하게 반짝이며 “와~ 맛있겠다. 그거 뭐예요?” -D.R-

● 해맑게 웃으며 “껄껄껄..” 엄마 같은 말투로 “어서 가보세요” , “알록님도, 함께 가면 좋겠네요” -J.W-

● “알록님~ 반가워요~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죠? 헤헤” -S.Y-

● 사람들이 칭찬이 할 때마다.. “알록 메인 셰프님께서… 허허허” -H-

● 또박또박하게 “알.록.님~알.록.님은 누구나 선생님 안 하세요? 우고 싶은데... ” -A-

● “그래서… 제가 작은 성공 같이 하자고 했었던 건데… ” -E-

● “하실 수 있겠어요? 못하겠으면 얘기해요” “먼저 가세요. 저는 기다렸다 같이 갈게요.” -N.R-

● “카탄 하실래요?”, “클라이밍 가실래요?” -J.N1-

● “그랬지, 뭐야~” -J.N2-

● “괜찮아~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D.O-

● 털털하게 “(솔방울 한 뭉치) 다 쓰세요” -S.N-


● 예쁜 하이톤으로 “알↗로옥→ 저 왔어요~” “난 알록 너무 재미있어요. 알록 은근 드립 많이 치는데…” -H.B-

● 어딘가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냥 사는 게 여행인 것 같아요” -G.D-

● 홍조빛 얼굴을 하며… “우리 친구예요” -K.M-

● 가슴 높이로 검지 손가락을 위로 향해 들며.. “그럴 줄 알고, 준비를 했습니다. 헤헤” “그리고 주체성과 겸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다들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원해요” (Y.B)

● 기타 들고 있는 내게 “우와…” -R.M-

● 쭈그려 앉아, 바느질하며.. “저, 이 수업, 다시는 안 할 거예요. 엉엉” -S.L-

● “알록님, 제가 떨어진 손잡이 붙이고 왔어요” 눈을 깜빡이며 “만든 진열장은 어떻게 하실는지요?” 깜빡깜빡 -R.O-

● “우와~ 그거 뭐예요? 알록님 잘 차려 드시는 거 같아요. 볼 때마다 드시고 계시네요?” –Y.J-

● 카메라에 담긴-얼굴 잘린- 컷을 보여주며 “쓰읍…이..이..거 괜찮으시겠어요? ㅎㄷㄷ...” -B.G-

● 호탕하게 “Right?!” -Q.N-

● 노래 부르는 중간에.. “다 같이” -B.H-

● 책을 펼쳐 보이며.. “나는 돌 씹어 먹는 아이예요” -E.U-


괜찮아마을 떠나던 날... Photo by. 공장공장-

-(에필로그 같은) 프롤로그- 


사무실을 나오며 L씨가 말했다.

"에세이라... 어후… 그걸 어느 세월에 써요. 

차라리 페인트 칠이 더 낫지 않아요? 그냥 한 3일 빠짝 하고 끝내는 게 더 깔끔할 것 같은데요…”

그러게... 

하지만 연말 기분 때문이었을까? 찌뿌둥한 컨디션 때문이었을까? 

뭐라도 제대로 마무리 지어 보고 싶었다.

좀 더 의미 있을 법한 일을 해서 '잉여'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던 건데…

한 해를 마무리하며 또 괜찮아 마을에서의 12주를 정리한답시고 사진이며 글이며 다 정리를 했었건만…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란 곧 삭제를 의미함- 이렇게 다시 불러들이는 작업을 다시 하려고 하니 잘 못 한 선택은 아닌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메모라도 좀 꾸준히 해 놓는 건데…”

어쨌든 이 날부터 밀물처럼 밀려든 '에.세.이' 세 글자가 내 머릿속을 계속 둥둥 떠다녔다.

12주… 

길지만 짧고, 짧지만 길고었던.. 평범한 듯 특별하고 특별한 듯 평범했던 시간들을

밥 먹다가 생각하고, 씻다가 생각하고, 잠에서 깨서 되뇌었다.

“밀물이 끝까지 들어와야 썰물이 오겠구나” 싶어 

며칠 밤은 누운 몸을 다시 일으키고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에세이라 해도 그저 뭐 일기 쓰듯 써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려놓고 나서야 뒤늦은 현타가 왔다.

“아차차 내가 이제부터 써내려 가야 할 글은 자물쇠를 걸어 잠가 나만 알 수 있는 장소에 몰래 숨겨 놓는 글이 아녔구나!”

분명 내 속에서 수많은 말들과 생각들이 피어났었건만…

왜 지금 건진 그물에는 뭣 하나 걸리는 게 없을까?

어쩌다 걸려도 너무 꽁꽁 얼어서 만질 수가 없었다.

차가운 이미지, 차가운 멜로디, 차가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등장하는 모든 걸 얼려버리는 엘사처럼 내 손가락에도 차디 찬 기운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 호밀밭 파수꾼’의 주인공 샐린저가 실제 내 주변에 사는 인물이라면 상상해 본다.

다듬어지지 않고 거친 것은 그저 판타지 속에 담았을 때만 빛이 나는 걸까?

아! 풀 수 있을까... 자물쇠?

아! 쓸 수 있을까... 에세이?

언젠가 접하고, 마음이 두었던 문장을 꺼낸다. 

"두려움이란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그래 “욕심을 버리자!"


-에필로그-
끝이다! 에잇! 게시판! 

욕심이 과했다 하노라....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