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이유지
2018-09-12
조회수 3192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내가 목포에 내려오게 된 이유.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다시 그 때로 고개를 돌려 기억을 더듬어본다.
간결하게 얼버무리고 싶다가도 조금 더 설명하고 싶고, 하지만 결국엔 모든 걸 꺼내 놓을 수 없어서
'그런', '이런' 등의 지칭어를 써가며 어쩔 수없이 빙빙 돌려 말하게 될 이야기다.
이 애매함이 나는 또 부끄럽다. 그래도 써내려가본다.




나는 오만했다.
주변에서, 매스컴에서 들려오는 불행들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그런 일들이 내 인생에도 일어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내 인생만큼은, 그래, 적당한 역경과 고난, 이젠 자양분이 된 어린 시절의 상처, 이 정도면 끝인 거야-
설마, 내게.
그런 류의 불행들까지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무얼 안다고 감히 타인을 연민했나.
연민을 하면서도 '내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기정사실화하며 안도했을 나의 무의식.
참 오만했다.


2018년 봄.
가족, 학업, 건강, 사랑.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오던 사건들이 한꺼번에 찾아와 내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라 더 버거웠다.

그렇게 내 몸도 마음도 스스로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런 나를 혼자 있게 둘 수 없다고 꿋꿋이 내 곁에 있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겐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내 치부를 알고, 그것을 보듬어준 사람들.
내게 집을 내어주고 하루 세 끼를 꼬박 꼬박 챙겨주었으며, 잘게 쪼개도 모자랄 그들의 시간까지 나눠주었다.
잘 자고 잘 먹고 힘내야한다고. 그들과 함께하는 밥상머리에서 나는 항상 목이 메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에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겨우 밥을 넘기곤 했다.



귀여운 시바견 두 마리가 있는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송미 언니를 만났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다시 약해져서 지친 마음을 쏟아내버렸다.

받아내기 힘겨웠을 그 문장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언니는 내게 물었다.
"목포에서 며칠 지내보는 건 어때?"

언니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공장공장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고,
공장공장 사람들은 우진장의 방 하나를 내게 선뜻 내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단 5일의 쉼을 생각하고 목포로 내려갔다.
별 생각이 없었다. 서울에서 빨리 도망쳐야겠다는 생각 뿐.
태어나서 목포에 가본 적도 없었다.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다.

그리고 그 5일의 시간이,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될 줄도 전혀 몰랐다.



공장 공장 사람들에게 고마웠던 점은, 적당함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뭉근하게 지켜봐 주며 적당한 관심을 주었다.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내게 굳이 묻지 않았다.

난초같이 잔잔한 향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우진장 옥상에 누워 책을 읽고 있으면 슥 나타나 옥상 난간에 꼬마전구를 둘러주고,
스피커 사용방법을 알려주고선 다시 슥 하고 사라졌다.



위층 방에서 늦잠을 자고서 팅팅 부은 얼굴로 사무실을 지나쳐가면,
일을 하고 있던 그들은 "유지씨 오늘 점심 뭐 먹을까요?"하고 물어봐주었다.

밥때가 되면 내 이름을 부르고, 사무실 책상 한 켠을 내어주며 안부를 물었다.
우진장 대청소도 같이 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작업하는 걸 구경하면서 괜히 훈수도 두고, 회식도 같이 했다.




동네 어르신이 선물해주신 수박으로 화채를 만들어 먹고, 옥수수와 떡을 쪄 먹고, 레오와 공놀이를 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잔잔하게 즐거웠다.



까만 밤하늘을 가만히 들여보다 보면 별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인다.
이곳의 사람들도 그랬다.
시간이 흐를수록 반짝이는 부분들이 점점 더 많이 보였다.
어떻게 이런 둥근 사람들만 한 곳에 모였을까.
사람은 참 입체적이구나라고 느끼면서 그들의 특출난 부분도, 부족한 부분도 모두 똑같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그냥 그들 자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머리보다 마음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었다.



우진장 옥상에 홀로 앉아 자주 멍을 때리곤 했다.
그날도 혼자 가만히 앉아 별을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이 사람들과 더 있어도 괜찮겠다.'





영국에 있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우진장에서 만난 사람, 민수 씨>

나처럼 잠시 쉬러 왔다가 6개월을 우진장에서 지냈었던 민수 씨.

그는 사람들을 보러 오랜만에 우진장에 들렀다고 했다.
궁금했다.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어떤 감정들을 지나왔으며
시간이 흘러도 그는 왜 이곳을 다시 찾게 되는걸까.
우진장의 손님 신분이었던 우리 둘은 마주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이야기보다 나를 향한 질문을 더 많이 던졌다.
(어떠한 계기로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당사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 그 부분은 생략해요.)

그의 물음에 나는 자연스레 조금씩 나의 이야길 터놓기 시작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럽다. 죽을 것 같은 정도의 마음이었다니."

"아니요, 그런 아름다운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

"그런데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몰라요, 그냥 제가 부끄러워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나약했던 것 같아요."

민수 씨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남들이 더 힘들어 보인다고 해서 본인이 힘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왜"라고 시작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내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그 대화가 힘겨우면서도 흥미로웠다.
그가 던지는, 또 내가 던지는 "나"에 대한 질문은 새벽 네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에게도 차마 모든 걸 다 말해주진 못했다.
그래도 고마웠다.




<우진장에서 만난 사람, 은경 씨>

은경 씨를 만났다.
목포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그녀에게 그 때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녈 만난 그날 밤은 참 묘했다.

은경 씨는 공장 공장이 기획했던 여행 프로그램 <놀먹사>에 참여했다가
그때의 기억이 짙게 남아 홀로 다시 우진장을 찾아온 손님이었다.

그녀가 도착한 날 잠깐 인사를 나누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우진장 옥상에 함께 앉아 이야길 하는데 그냥 편안했다.
그녀는 나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언니 같은 구석이 참 많았다.

공장공장이 해내고 있는 것들이 자기 삶의 어떤 근거가 되어주는 것 같다고 했다.
매사에 치이느라 진이 빠져 막다른 곳에 다다르게 되어도, 그 지점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믿는 구석 같은 그런 곳.
그래서 공장공장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게 응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눈빛을 찬찬히 살피고, 목소리를 가만가만 듣는데,
왠지 모르게, 무언가 그녀에게 다 얘기하고 싶어졌다. 털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경 씨, 왠지 모르겠는데 나 지금, 은경 씨한테 다 말하고 싶어요."
이 한 마디를 꺼내버리고 나서 다시 어려운 마음이 들어 꽤 오랜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의미 없는 연결어들로 그 공백을 채우다 다시 결심이 서서 말을 뱉었다.

내 첫 마디를 듣고 은경 씨가 먼저 울기 시작했다. 나도 뒤이어 엉엉 울며 이야길 이어나갔다.
그렇게 한바탕 함께 눈물을 쏟고 나니 비로소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비슷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묘한 날이었다. 사람의 눈빛을 더 믿게 됐다.

며칠 뒤 그녀로부터 온 문자.
"문득문득 생각나겠지만 곧 다른 나쁜 기억들처럼 괜찮아질 거예요.
난 이제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가끔 번뜩해도 금방 다른 생각으로 덮어버려요.
회피라 해도 그게 우리 마음에 나은 방식이라면 그냥 좀 남 일처럼 잊고 살아요, 우리.
그래도 되더라고요. 쉽진 않지만. 언니 웃는 얼굴 진짜 예쁘니까 더더 많이 웃어요, 꼭!
담에 갔을 땐 우리 엉엉 우는 거 말고 웃다 지쳐 우는 걸로 해요."


어느덧 목포에서의 생활이 5일을 훌쩍 넘어 2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보내준 소포



공장공장은 한창 괜찮아마을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뒤늦게 사무실로 돌아온 명호 씨와 인사도 할 겸 옥상에서 더 얘길 나누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남미에 있을 때부터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간간히 올리던 영상들을 인상깊게 봤었다고 했다.


"우리와 꼭 한 번 함께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작업자 두 명 중 하나였어요."


그리고 그 영상들을 만든 사람이 지금 사무실 바로 윗방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과 동일인물일 줄은,
그러니까 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끄적끄적 만들었던 일기 같은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쑥스러웠다.
혼자 불안해하면서도 그저 재미있어서 창작을 했던 행위에 단단한 의미가 실리는 것 같았다.
그저 감사했다.

며칠 뒤, 명호 씨와 동우 씨로부터 괜찮아마을 홍보영상 외주를 제안 받았다.
예상치 못했지만,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래서 목포에서 지내는 기간이 한 달로 늘어났다.

용호씨가 선견지명이 있나 싶었다.
내가 목포에 내려온 지 5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어차피 유지씨는 여기 한 달 있을거니까-'라며 장난스럽게 말하곤 했었다.
내 별명은 '앞으로 한 달 있을 유지씨'가 되었고 나는 아니라고 웃으며 손사래 쳤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며칠 뒤, 동우 씨와 명호 씨가 다시 제안을 했다.
직원으로 더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고,
나는 두 달의 시간이 최대일 것 같다고 했다.
본래의 내 일상을 되찾아야 했기 때문에.
목포에서의 생활은 아직 내겐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끼어든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나는 목포에 지낼 곳을 얻고서 서울에 있는 방을 빼기에 이르렀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용호씨는 다시 "유지씨 한 일 년 있을거니까-"라고 기간을 바꿔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연남동 스윗홈 아디오스!




목포에 오기 전에 나를 돌봐주었던 언니와 친구가 목포에 왔다.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내가 더 약해질까봐 뒤에서 내 아픔을 보며 몰래 울었던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왜 그렇게 울 일이 많았던지.

목포에서의 마지막 밤, 우린 옛날 이야기를 마구마구 꺼냈고 그 때의 마음을 더 솔직하게 드러내며 또 같이 울었다.

나는 다음 날 눈이 땡땡 부어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출근을 했다.



그 날 밤의 이야기를 곱씹을 수록 마음이 콕콕 쑤셨다. 너무 아프고 또 아팠다.

내 상황에 깊이 빠져 그들의 속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못해왔던 내가 야속했다.

몰아치는 감정이 고통스러웠지만,  언젠간 거쳐야할 시간이었다.

그만큼 내게 이미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구나,

그저 '우리'라는 이유로, 어떠한 잣대를 들이밀고 잴 필요 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가족이구나-라고 다시 느꼈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과정을 알고 내가 약해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도와준 이들이 직접 나를 보러 왔다는 것.

어쩌다 눌러 앉아버리게 된 이곳에서의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

참 마음 몽글몽글해지는 일이었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골목을 같이 걷고, 

나 없이 둘만 있는 시간엔 알아서 동네 미용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내가 점찍어준 카페와 식당들을 목포 로컬인 마냥 반복해서 갔다.

'지금 어디야?'라고 서울과 세종에 있던 그들이 전화로 물을 때마다, 내가 하던 대답, '우진장 옥상'.

그곳에도 드디어 함께 올랐다. 사진으로 많이 봤던 레오는 왜 지금 없냐고 아쉬워 하기도 했다.

우리 집 수압이 폭포수라고 감탄하며 늦은 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선,

바리바리 싸들고 온 국적별 와인과 안주를 짠하고 차려두어 새벽의 시작을 알렸다.

고양이 강아지 지나가는 것만 봐도 꺄르르 웃고,

조금 더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면 눈을 빛냈다.


그들은 목포에 있는 내내 무언가 대단하고 요란스러운 여행을 하려 하지 않았고,

말로만 전해듣던 내 일상을 직접 마주하며 그것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시간을 즐겼다.





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유지야, 이곳에 와보니까, 또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네가 왜 여기 발 붙이고 있는지 나는 알겠더라."


나는 내가 왜 남아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언니는 알 것 같다고 했다. 






사진: 밍둥

사진: 밍둥

사진: 밍둥

민주언니가 찍어준 사진 속의 내가 정말 활짝 웃고 있어서 놀랐었다.


사진: 밍둥




그렇게 두 달이 또 지났다.

목포라는 공간, 사람, 일에 대한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어가면서
내 마음속에 의문이 커져갔다.

나는 왜 이곳에 계속 남아있을까?
나는 이곳에 필요한 사람인가?
혼란스러웠다.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내가 왜 더 남아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또 떠난다고 생각하면, 무언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려웠다.


명호 씨와 동우 씨는 다시 내게 물었다. 8월이 지나면 정말 떠날 것인지.

한 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지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앞으로 또 유지 씨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게 뭐에요? 있다면 그걸 같이 해봐요."


또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유지 씨가 더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을 떠나서, 나는 그냥, 안타까워요. 우리가 이렇게 같이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제 그 판을 채워나갈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을 못 보고 떠난다는 게.
서울에서 괜찮아마을 입주자 면접날, 면접 대상자들 한 명 한 명과 얘길 나누고 왔어요.
같이 눈물도 많이 흘리고 웃기도 많이 웃었어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그냥, 내 사람들을 그냥 떠나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서로 더 오래오래 보면서, 같이 행복하게 붙잡아두는 게 그게 제가 생각하기엔 맞는 편 같아요."


두 사람의 말은 서로 무척이나 다른 느낌이었지만,
모두 내 마음을 붙잡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나.
"유지씨가 하고 싶은 게 뭐예요?"

둘.
"유지씨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들의 꿈을 도와주기 위해 내 본래의 꿈을 미루는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었다.
목포라는 공간이 내게 있어 완벽한 유토피아도 아니었고, 물리기도 할 때도 참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흐를 수록, 이곳에서 쌓아가고 있는 일상 또한 나의 꿈이구나-라고 느끼는 지점들이 생겨났다.
차곡차곡.


그래서 또,

더 있기로 했다.


괜찮아 마을 입주식 날.
내게는 입주자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는 날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그들의 눈빛과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며, 각자의 짧은 소개를 숨죽여 들었다.




두 달 전의 내 모습이 그들과 겹쳐 보이기도 하면서,
이미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서른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찼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밀려왔다.

'더 남아있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겨우겨우 참아냈다.

입주자들의 이야기가 끝나고서, 잠시 쉬는 시간, 사람들이 우르르 강당을 빠져나간 사이에
송미언니 얼굴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도 제발 그만 울고 싶다ㅋ)
언니는 그런 나를 꼭 안아주었다.

6주 뒤, 이들도 부디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이곳에서 겪은 것들을 시끄럽게 떠들며 그들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고 강권하고 싶지 않다.
그냥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그들만의 자연스러운 자리에 다다를 것을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공장공장 식구들에게.


사실 글을 쓰는데 너무 어려웠어요.
제가 목포로 내려오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건
이제 제겐 더 이상 어떤 흥미도 의욕도 가져다주질 않거든요. 

그만큼 지금의 저는 많이 행복하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오래 걸렸어요, 이제 굳이 꺼내지 않아도 괜찮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돼서.


모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아!


끄읕! 아이고 후련해



사진: 용호

사진: 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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