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_ 괜찮아마을 3기 후기

괜마3기주민
2020-01-20
조회수 1448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하다가 진짜로 끝나버렸다.

12주라는 (일년의 1/4) 목포에서의 길고도 짧은 시간이 끝났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나를 발견하고, 지속 가능하게 설계 하는 것 등.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이것들을 공장공장 괜찮아마을을 통해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선 그동안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일상에 지쳐버린 괜찮지 않았던 사람들이, 괜찮아져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러나 20년 넘게 만들어진 틀에 갇혀 살았던 때가 많았던 3기 주민들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이상적이면서도, 현실로 돌아가기에 너무나 빠른 길이였던 것은 부정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지속하지 못했던 안타까움과 진짜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몸부림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작은 성공들의 연속이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려고 한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 있어 괜찮아마을이 ‘있는 그대로 비추고, 받아들이는 시간’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사회는 지극히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적 갈망은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특정 인물과 특별한 관계를 이루어 가는 진정한 즐거움을 맞본 경험의 부재로 관계에 있어 점점 더 빠르게 포기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들이 많아졌고 어쩌면 당연해 졌다.

그러나 인간 본성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없이 결핍을 느끼며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반하여 각자의 결핍을 채우고 싶어한다. 더 나아가 뽐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 바라 본 인간 세계는 그래보였다.

[TMI. 인간 세계란 단어는 한라산 등반 시 구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광경을 접한 뒤 쓰게 되었다.ㅋ]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셰어하우스, 셰어사무실, 아파트 내 공동 부엌, 대여샵 등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 같다.

관점에 따라 이러한 형태가 지극히 개인의 필요만 쏙쏙, 혹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그 상황에 위치해 있을 때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나뉘어 질 것 같다.

사실 나는 굉장히 개인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열정이 있으나, 늘 상황이나 마음이 함께 하는 쪽을 거스르질 못한다.

나의 열정과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여 알게 모르게 남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을 줄 안다.

갈등 중에도 확실 한 것은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서는 온전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며 괜찮다가도 금새 안 괜찮아지고의 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혹은 만들어 가고 있다면 적어도 이렇게 반복되는 우울의 순간에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괜찮아마을에 있으면서, 괜찮아마을을 만든 공장공장의 가치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치의 의미가 궁금했고,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3달동안 마을에 지내면서, 주민 한명 한명의 삶을 깊게 이해하거나 그럴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진 않았다.

그러나 어떤 표현 할 수 없는, 스며들어져 있는 모든 분위기가 참 따뜻한 사람들이였다.

낯설어서 일까, 따뜻함이 좋아서 였을까, 사소한 모든 상황에서 비추어지는 모습들에 집중하며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재밌는 프로그램들도 많이 했었다.

접해 보지 못한 공동체를 알아가는 문답들로 인한 자세와 방식들. 새롭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 준 대로 실천하고 있는 공장공장이 멋졌다.


처음 16명의 우리는 한동안 문학, 철학 시간과 같은 머리와 마음을 쓰다가, 쉬는 시간으로 별을 보러 갔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전조등을 끈 채로 주행했다. 약 10명의 목숨이 운전자인 감동님의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우리는 어두움과 음악에 흠뻑 취해있었다.

마치 별을 보러 가는 길이, 내 인생 중 가장 고심 했던 시기의 집중도와 비슷했었다고나 할까,

아마 목포를 왜 왔고, 남은 목포에서 어떻게 지내고 싶은 지를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격 예체능시간에 들어섰다.

큰 성공 아니고 지극히 작은 성공, 빈집 설계 아니고 빈집 상상, 모두의 선생님 아니고 누구나 선생님 등 자신만의 색깔로 자신만이 표현하고자 하는대로 나름대로 모두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중간 중간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었다. 그러나 목포에서 만큼은 백지의 나로 편안히 있고 싶었기에 ‘작은’성공이지. 라는 것을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덕분에 경쟁하지 않을 수 있었고, 뽐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당사자가 설명한 대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결과물이었다.


졸업 작품 전시회(작은 성공 선포식)까지 모두 마친 뒤, 5명이 서울로 돌아가고 11명이 함께 생활했다.

이별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영상에서 보았던 부둥켜 껴안고 놓아주지 못한 채 눈물을 여기저기서 흘리는 광경은 없었다.

덤덤했고, 각자의 자리와 본격적인 시작을 응원했다.


예상과 달리 나머지 11명도 꽤 분주했던 것 같다.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하루에 인사만 나눌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 지 알고 있어, 이야기를 해야 할 때엔 몸을 일으켜 찾아가곤 했었다.

어느 날은 퀭하게 서울에서 목포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털레털레 목포역 계단을 내려가는데 뭔가 익숙한 옷들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얼굴도 확인하기 전에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다. 

세상에, 표현은 절제 했지만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그리고 짐을 든 채 산책 코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는 동네 곳곳을 느낌이 가는대로 돌아다는 것을 좋아했다.

생활 패턴이 비슷(같)했던 몇몇은 하루의 시작으로 산책을 할 때가 많았다.

우리가 가는 길 중에 흔했던 길은 단 한 발자국도 없었다.(개인적으로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 온도, 조도, 주변 사람들 등 가만히 있는 게 없는 찰나의 걸음들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채워지고, 지나가고 몇몇이 서울로 먼저 올라갔다.

식탁에 놓여져 있는 롤링페이퍼를 가슴 찡하게 바라보며, 한 사람 한사람에게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눌러 썼다.

아무리 써도 다 표현되지 않을 말들이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페이퍼였다. 쓸 때도, 받을 때도..


나도 서울에 먼저 올라갔었다.

그리고 정말 마무리이자 시작의 단계로 새해 일출을 함께 보러 가기로 하였다.

유달산도 버거워서 헥헥대는데 무려, 제주도 한라산으로..!

무턱대고 간다고 했었는데, ‘원래 인성을 알려면 등산을 같이 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사이가 위험 해 질 수 있는 선택이었더라.

그러나 다들 인성과 체력에 또 한번 감탄할 수 있는 제주도행 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지는 나 자신이었다고 한다. 쩝..


그렇게 다시 짐을 가지러 목포로 돌아왔다.

우리는 목포에서의 목표 했던 바들을 이룬 것도, 못한 것도 있다.

목포에서의 지속적인 삶에 대해 함께 고민을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함께라면 하지 않았을, 못했을 그런 생각들을 하며 또 따로 흩어짐을 준비했다.


기분이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렇지 않고 싶어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앞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 또 다시 크게 느껴져서, 그동안의 시간이 무색해 질까봐, 우리가 다시 괜찮아지지 않을까봐..등의 

생각을 접고, 있는 그대로를 취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쫄래쫄래 뒤 따라 오고 있는 작은 성공들을 잘 이끌다가 우리가 또 계속해서 만났을 때에 서로가 발견 해 줄 수 있기를.. 

그 따뜻함들을 본인이 속한 공동체에서도 느낄 수 있기를..

라고 응원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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